단순히 4개의 혈액형 타입으로 성향을 분석하는 것보단 확실히 16개의 그럴싸한 분석들이MBTI를 맹신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미로 보는 각종 유사 테스트들을 해봐도 항상 공통적으로 나오는 성향들이 있다는 것에 더더욱 신뢰가 갔다.
그런 나에게 MBTI에 대한 의문이 든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남편과 나는 내향형(I)인것 빼고는 모두 다른 성향이다.
MBTI에 의하면, 나는 현실적이고 결과를 중시하며 계획적이지만 남편은 이상적이고 감정을 중시하며 즉흥적이다.
"우리 지난달에 여행 다녀와서 당분간은 돈 아껴야 하니까 오늘은 딱 10만 원만 쓰자!"
지난주 오랜만에 외출을 하며 남편과 한 약속이다. 혹시나 즉흥적인 남편이 계획에 없던 물건을 사자고 할까봐 미리 차단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뱉은 말이 무색하게도 오랜만에 간 쇼핑몰에서 고삐가 풀린 건 나였다.
-어머 이건 꼭 사야 돼!
-내가 고생해서 번 돈인데 고작 이런 디저트 하나 못 사 먹어? 먹자!
-여보, 이거 할인한다! 오히려 지금 사는 게 이득일 것 같아! 여보 살래?
계획적 성향은 개뿔 즉흥의 끝판왕..
오히려 남편은 나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켜 잠깐 검색해 보더니 나중에 사겠다며 내 달콤한 제안을 거절했다.
이번 주말은 밖이 너무 더울 것 같아 각자 취미생활을 하며 집에서 쉬었다. 나는 지난주에 즉흥적으로 샀던 500피스 퍼즐을 호기롭게 꺼내 피스들을 색깔별로 나열하고 하나씩 맞춰나갔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색깔로는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배경 쪽을 맞추다 보니 슬슬 '하기싫어증'이 발현됐다. 결국 다 맞추지 않은 채 넷플릭스를 켰다.
남편이 요새 빠진 취미는 건담 프라모델 만들기이다.
죄다 일본어로 되어있는 설명서를 번역기를 돌려가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집중한 그를 보고 궁금했다. 저게 그렇게 재밌나?
충동적인 호기심으로 사놨던 초보버전(?)의 건담이 생각이 나 남편 옆에 가져와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그림만 보고도 만들 수 있는 수준이어서 뚝딱뚝딱 맞추던 와중에 위기가 왔다.
내 새끼발톱보다도 작은 스티커를 정육면체 형태로 붙이라니.. 나름 남편의 핀셋을 들고 두세 번 시도해 봤으나 자꾸 빗나가는 스티커에 내 얼굴이 찌푸려졌나 보다.
"여보, 이걸로 헤매면 흥미 잃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이것만 도와줄게."
내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하기싫어증을 방지하기 위한 남편의 탁월한 한마디였다. 고집도 드럽게 세고 자존심도 센 편이라 남이 호의로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도움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한 번 하기 싫으면 아예 놔버리는 편인데 남편이 적당히 말려준 것이다.
흩뿌려놨던 퍼즐도 어느새 남편 손에 의해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퍼즐과는 안 맞는 것 같다며 아예 놔버렸는데, 저녁밥을 만드는 사이에 그는 차분히 모두 맞춰놓았다.
하긴 다시 생각해 보면 16개 타입으로 나눠놓은 MBTI도 80억 인구를 모두 대변하기엔 역부족인 것이 당연한 것 같다. 현실적인 사람도 감정적일 때가 있을 테고, 모든 일에계획적이냐 즉흥적이냐 딱딱 나눠져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