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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Feb 17. 2021

[야구소녀 (2019)]

《Baseball Girl》 끓지 않으면 끓을 수 있도록

물질의 종류마다 끓는점은 다르다. 알다시피 물은 100도에 끓는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 하나를 까먹은 상태인데 끓는점은 외부 압력에 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기압이 1이어야만 100도에 물이 끓는다. 만약 기압이 달라지면 더 빨리 끓을 수도 있고, 훨씬 늦게 끓을 수도 있다. 오늘의 영화, 《야구소녀 (2019)》는 끝내 끓지 못한 주인공이 스스로 기압을 바꾸는 영화다.

포스터 ⓒ movie.naver.com

감독 : 최윤태

장르 : 드라마

개봉 : 2020.06.18. 개봉

시간 : 105분

연령제한 : 12세 관람가

국내 관객 수 : 37,409명


이후의 내용은 설명에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느려졌다."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자로 입학한 주수인 (이주영)은 리틀 야구단부터 같이 한 이정호 (곽동연)가 프로 팀 입단을 확정 지었을 때, 느려진 본인을 탓했을 것이다. 최고 구속 134km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으로 '천재 야구소녀'라는 별명까지 붙었는데, 이제는 취미로 야구하라는 말까지 듣는다. 분명 나는 빨랐는데.


 새로 온 코치 최진태 (이준혁)는 이런 수인을 보고 안타까워한다. 정확히는 본인 꼴 나지 않게 최선을 다한다. 프로의 문턱에 걸려 넘어진 진태는 넘어지기 전에 포기하란 말로 수인을 회유한다. 엄마 신해숙 (염혜란)은 본인이 다니던 회사에 미리 언질 해놨다며 면접만 보자고 한다. 하지만 수인은,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
진태에게 수인은 아픈 손가락이면서 과거, 본인의 초상이다.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길 바라며 ⓒ movie.daum.net

 결국 끝까지 해볼 셈이다. 넘어져 볼 심상인 거다. 진태는 마음을 뜯어고쳐 최선을 다해, 이 소녀가 넘어질 때 덜 아프도록, 다시 일어날 때 미련 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서포트해준다. 강속구가 장점이었던 수인에게 느리고 알 수 없는 너클볼을 제안한다. 아빠 주귀남 (송영규)은 몇 년째 붙잡던 공인중개사 시험을 마지막으로 보고자 하고 수인 역시 곧 있을 트라이 아웃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엄마의 회사에서 기름밥을 먹으며 너클볼을 연습한다.


 느려졌다. 강속구는 온데간데없고 굽어가는 엄마의 허리 같은 너클볼만 있을 뿐이다. 또 늘어졌다. 그토록 힘들게 연습했는데 아빠의 공인중개사 시험은 합격이 아닌 경찰을 불러왔다. 알고 보니 부정 시험을 치른 것이다. 해숙은 수습하기 바빴고 귀남은 고개만 퍽 떨군다. 동생 주수형 (박연수)을 돌봐야 했던 그 상황에 수인은 다시 한번 늘어진다. 그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는 꿈과 초췌하게만 만드는 일상에 치이던 수인이지만 진태와 정호가 여전히, 그런 수인을 응원해준다. 수인은 끝내 트라이 아웃, 입단 테스트 마운드에 올라섰다.

수인은 좌절한다. 포기 빼고 다 한다. ⓒ movie.daum.net

 여자는 비웃음거리였고 짓궂은 장난 거리에 불과했다. 단 두 명 밖에 없었음에도 무시 혹은 괄시받았고 공을 던지는 수인은 남들과는 달리 "특별하게" 테스트받았다. 대개 '여자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겠어'의 식이었다. 감독은 프로 선수를 타석에 세웠고 진태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공을 던져야만 했다. 너클볼로 얻어낸 두 번의 스트라이크, 그리고 마지막 승부수는 직구였다. 130km 남짓의 직구는 가볍게 얻어맞았는데 수인의 글러브에 안기면서 플라이 아웃, 수인이 이겨냈다.


"수인이는 자기가 못한다고 말한 적 한 번도 없거든요. 근데 저희가 못한다고 먼저 정해버리면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서요."


 해숙은 입단 테스트를 몰래 지켜본 후 코치 진태에게서 조언 아닌 조언을 듣는다. 그날 밤, 어릴 적 수인의 이야기와 함께, 해숙은 본인의 잘못이라며 "미안해"를 수인 옆에 내려놓는다. 처음 듣는 사과에 수인은 싱숭생숭해한다.


 강당이 시끌벅적해지도록 수인을 부른다. 정호의 프로 계약 체결에 그 누구보다 함박웃음을 지었던 교장이 수인에게도 "자랑스럽다"라고 말한다. 수인은 어리둥절한 채 프로 구단 프런트와의 협상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퍽 웃질 못한다….


 최윤태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야구소녀 (2019)》는 《메기 (2018)》,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2020)》로 주목받은 이주영의 주연 작품이었다. 이주영은 이 영화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뉴욕아시아영화제에서는 라이징 스타상을 받았다. 《이태원 클라쓰 (2020)》의 중성적인 이미지와 체대 출신의 '짬바'가 잘 어우러져 《야구소녀 (2019)》의 주수인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다.

배우 이주영은 《메기 (2018)》, 《이태원 클라쓰 (2020)》, 《야구소녀 (2019)》를 통해 영화계에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 imdb.com

 영화는 19살 수인에게 주목한다. 150km은 던져야 프로로 가는 세상에서 너클볼을 던져야 했던, 억척스럽게 망가진 일상 속에서도 꿈이라는 희망을 품어야 했던, 그 수인에게 집중한다. 실제로 일본의 요시다 에리는 너클볼로 프로에 진출한 최초의 여성 투수였다. 유사하게 국내 여자 야구선수 1호인 안향미, 최연소 여자 야구 국가대표 김라경 등이 수인의 밑그림이 되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여자 프로 야구 선수는 없었지만 영화 속 수인처럼 위의 세 사람들은 묵묵히 볼을 던졌을 것이다.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그 무모함이 결국 주위 사람들까지 변하게 한다."


 배우 이주영은 수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먹고살기에 바쁜 식구들과 꿈을 넘어서지 못한 신참 코치, 다른 꿈을 좇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친구 한방글 (주해은), 그 사이에서의 수인은 "내가 해낼 테니 다들 도전해봐"라고 말하는 듯 몸소 실천한다.

ⓒ imdb.com

 던지는 볼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보다 더 느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인은 설득했다. 해낼 수 있다고, 나 끓을 수 있다고. 온갖 압력에 끓지 못했던 수인은 결국 주변을 바꿨다. 그 기압을 바꿔냈다. 마침내 끓는다. 끓기까지 느렸을지언정 결국 도달했다. 마침내 완투다.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묵묵히 달궈지고 있는 그들에게, 영화 《야구소녀 (201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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