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게 살지 않는 법 外

by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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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넘게 살지 않는 법


무슨무슨 척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잘난 척’에 젖어 살았고 - 사실 이건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아빠를 닮은 나머지 ‘폼생폼사’의 DNA가 묻어 있다 - 지금은 ‘아는 척’에 빠져 있다. 지적 허영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알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깊이는 얇지만 다방면을 두루두루 알려고 노력했다. 가끔 잘 보이고 싶은 사람한테 그럴듯한 개똥철학을 전파하기도 했고, ‘뇌피셜’을 논리성 있게 구성하기 위해 짜깁기를 한 적도 있었다.


결국엔 허세고, 멍청함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다. 나는 멍청하고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기에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했고, 애석하게도 그 자존심 때문에 나는 똑똑해지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그 척하는 삶 덕분에 내가 넘보지 못할 세계에 잠시 몸담아 본 적도 있었다. 능력보다 더 뛰어난 기회와 경험이었고, 거기서 즐기지 못하고 버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나, 그래도 ‘운이 좋을 정도’의 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행복을 영위하자는 나의 인생철학 면에서, 그런 ‘척’들이 모여 나의 불행을 만들었다. 애쓰기 위해 발버둥 한 것들이 나의 행복까지 걷어찼다. 벼룩을 컵에 가두면 딱 그 정도만 뛰면서 산다는 그 이야기는 한계를 설정하는 건 외부 요인이라는 말처럼 이해되는 나머지 그릇의 크기는 내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교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벼룩이 한계점에 봉착한 것이 아닌 행복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뛰는 것처럼 보인다. 나에겐 지나치게 많은 자유와 도전이 주어진 나머지, 행복하지 못할 만큼을 뛰고 있는 셈이다.


골을 넣어 주인공이 되는 사람이 있고, 그 골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또 골을 만들기까지 같이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 대개 나의 역할은 득점을 위해 같이 뛰어주는, 일개 엑스트라 1, 2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에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것들이 이제는 소년 만화 같지 않아 졌다. 내 주제를 모르고, 분수도 모르고, 마음 가는 대로 굴어버리는 철없는 낭만가처럼 보였다.


난 이제 내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실수와 어리석음이 가득했고, 허세와 무슨무슨 척으로 버텼던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 주제는 무시당할 수 있고, 당하는 게 당연하며, 그러므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을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 그게 억울하지 않도록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 하고, 글을 써야 하는데 그간 그러지 못했으니 이제는 마이너스에서 제로로 가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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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해 주는 사람


끝나지 않은 연애의 양비론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냐,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냐. 대개 전자를 택해왔고, 지금도 그 기준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제는 누굴 ‘좋아하기’가 정말 쉽지 않아 졌다.


기준이란 게 나이가 들면서 높아진 건 분명 있다. 예전에는 같이 영화를 보고 싶고,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게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같이 늙고 싶고,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등 거창한 미래가 붙어버렸다. 그래도 시작점은 똑같다. 난 맛있는 걸 먹거나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기적이게도 근래 들어서 맛있는 걸 먹고도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이 1순위였던 삶에는 그나마 간간이 가족이 생각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나머지 떠오르는 게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1순위일리가 없으니 내가 먹고 싶은 것에 대한 행복도 그리 크지 않았다. 나는 맛있는 걸 먹는 게 좋지만, 누구랑 먹는지가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볼 때 대답하기 어려웠다. 때론 감동이기도 했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물어봐주는 사람이 가족 외에 얼마나 있겠냐만, 그들은 진심으로 나의 기호를 물어본 거 같다는 아주 사소한 생각에 나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랑받고 싶다는 수수로운 감정이 어쩌면 이런 것에도 동요하나 싶었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부서지기 쉽다.


상대가 기대하는 내 위치가 가끔 내 마음보다 작을 때가 많다. 분명 더 친하다 생각했는데 ‘넌 그 정도’라는 뉘앙스라거나, 순위권 안에 있던 상대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느낌을 줄 때, 여지없이 부서졌다. 이제는 안 부서지고, 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여유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차피 나는 항상 부서질 운명이면, 이왕이면 살살 깨지길 바라는 것이고, 혹시라도 안 부서질 수도 있지 않겠냐는 작은 희망을 품어보고 싶다. 내가 정말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네가 정말 필요로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내가 온 마음을 다해 도와주고 싶다. ‘사랑하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상대의 확신 없이도 내가 흔들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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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위는 한 시절이 아닌 평생이기에


성격이나 행동은 아직도 서른에 가깝지 않지만, 서른에 가까워진 게 하나 있다면 결국엔 대화 주제다. 영양가가 부족한 건 여전하지만, 모든 대화가 어느 하나의 귀결되곤 하는데 보통은 ‘결혼’인 거 같다. 비혼주의가 만연하고 자연스럽고, 그 이유가 온당한 현재에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동행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다. 코끼리를 상상하지 말라하면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처럼, 어쩌면 결혼도 너무 많이 생각해서 그런지 가장 현실화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연애는 호봉’이라고 생각해 온 사람이었기에 나의 삼십 대는 그 호봉을 뛰어넘는 승진이 따르길 바라고 있다. 이 호봉을 어떻게 쌓았는데, 왜 쌓았는데, 다 너를 위해서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에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나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고, 평탄하지 않은 인간관계 속에서, 흔치 않은 연애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단맛, 쓴맛 다 본 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온 인생을 너를 위해서는 눕히고 살고 싶다.


한 순간, 사랑에 빠진다면 평생을 다할 것처럼 군다. 물론 그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모든 걸 주지 않는 멍청한 짓은 안 한다. 내가 나중에 아파할지언정, 내 사랑은 혐오가 아닌 사랑 그 자체로 남았으면 좋겠으니까. 내가 사랑한 것은 사실이고, 그 사랑받는 감정은 상대가 간직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이제 사랑에 빠진다면 ‘평생을 다할 것’이 아닌, 정말 ‘평생’을 꿈꾸며 노력하고 싶다. 평생과 반대되는 선택지인 이별과 이혼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라는 말의 무게가 더 이상 가볍지 않고 싶다. 내 사랑을 가벼이 여기며 시작해도 상관없지만, 나중에는 내 사랑보다 큰 사랑은 없다는 걸 깨달아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오길 바란다. 생각해 보니 보통은 오지 않았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내가 다가가리라. 나에게 한 시절은 그렇게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길이었고, 그다음은 평생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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