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한 뼘쯤 더 친해졌고, 너의 사춘기는 한 뼘쯤 유예되었다.
그날은 왠지 책이 읽고 싶지 않았어.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했던지 글자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요즘 네가 즐겨보는 오래된 개그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는 네 옆에 가만히 앉아봤어.
그렇게 무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내게 네가 말했어.
"엄마가 그런 표정으로 있으니까 내가 못 웃겠어."
"아, 미안. 피곤하네. 그럼 엄마 저쪽 가서 책이나 읽을까?"
"아니야. 그래도 여기 있어.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
이제는 엄마랑 키도 비슷하게 자란 네가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날엔 엄마는 어김없이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이런 날이 조만간 오지 않을까 봐 요즘 두렵던 참이었거든.
나중에 방문을 쾅 닫기 전에 지금을 즐기라던 선배님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엄마는 그렇게 가만히 네 옆에 다시 앉았어.
엄마도 예전에는 개그프로그램이 할 시간이 되면 얼른 텔레비전을 켜 놓고 깔깔 웃으며 봤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유행어를 흉내 내며 사람들을 웃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본 개그프로그램에 이상하게 하나도 웃음이 나지 않았어.
참 이상했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
단지 나이를 조금 더(아니 조금 많이) 먹었을 뿐인데 그게 문제인 걸까.
골똘히 생각하는데
갑자기 한 대목에서 쿡 웃음이 나고 말았어.
쿡
그게 시작이었어.
한 번 웃음이 터지자 계속해서 배우들의 작은 말에도 웃음이 나기 시작했어.
내가 깔깔 웃기 시작하자 너는 더 크게 웃기 시작했어.
그러다 우리는 같은 대목에서 서로를 보며 낄낄 웃었어.
그러면서 배우들의 대사를 흉내 냈지.
"서울 살 수 있겠나,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런 나를 너는 놀려댔고, 우리는 또 함께 깔깔 웃었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심심찮게 웃어대던 내가 집에서 그런 웃음을 웃은 건, 참으로 오랜만인 듯했어. 게다가 그 옆에 네가 있었어. 몸집은 쑤욱 자랐지만 아직도 엄마에겐 어린아이인 네가.
엄만 그게 참 좋았어.
너와 시시껄렁한 개그를 흉내 내며 함께 웃던 게 말이야.
사춘기의 문턱을 조금씩 넘어가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밀려오던 요즘, 그 웃음은 우리를, 그리고 너를 다시 해맑은 아이로 되돌려 놓았지.
너와 나는 한 뼘쯤 더 친해졌고, 너의 사춘기는 한 뼘쯤 유예된 것 같았어.
웃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준 거야. 고맙게도.
엄마는 요즘도 그날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며 슬며시 웃곤 해. 물론 감사하게도 현실 속에서도 그 장면들이 종종 되풀이되고 있지만.
아들, 네게도 이날이 행복한 날이었길.
엄마는 가만히 바라본다.
추신. 몇 날며칠을 고심하며 개그프로그램을 만들어준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 2026년 2월. 아들과의 웃음 가득했던 하루를 떠올리며
요즘 들어 바쁜 일들이 마구 밀려와 연재요일이 하루 늦춰지고 말았네요.
순간, 그냥 이번 주는 슬쩍 넘어가야겠다.. 유혹이 밀려왔지만
그러면 다시 시작하기 힘들 것 같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완성해서 올려봅니다.
막상 완성하고 보니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데 뿌듯함이 밀려오네요.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좋은 밤 보내세요^^
#육아에세이 #웃찾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