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주도: 용두암-용연구름다리
우선, 저는 출판사 편집자입니다. 10년째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지요.
사실 출판사 편집자라는 직업은 투고원고를 대할 때 수락할 때보다 거절할 때가 더 많습니다. "좋은 원고입니다만 저희와는 방향이 맞지 않습니다.", "소중한 원고 감사합니다. 이미 출간 계획이 가득 차 있어서 받기가 어렵습니다.", "저희 출판사가 잘 팔 수 있는 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등등. 이런 거절 메일들은 진실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특히나 에세이 같은 경우, 판매해서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거절하곤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투고 원고에 다양한 거절의 메시지를 보내다 보면, 나도 마음이 아프고 죄송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저도 거절을 참 많이 당했습니다.
새로운 에세이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에 투고를 했는데, 몇 주간 '거절' 메일을 받았습니다. 메일함에 [Re: 원고 투고합니다]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걱정 90%, 기대 10%였습니다. 내용은 제가 보내던 출간 거절 문구와 비슷했습니다. 내가 보내던 메일을 내가 받게 되니 기분 참 묘하더군요. 그쪽 편집자의 사정을 알 것 같으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몇 주간 거절 메시지만 보다 보니,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고 도무지 글을 쓸 기분도 나지 않더군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브런치에 글을 몇 개 올리고, '그래도 나는 여전히 쓰는 사람이니까 괜찮다' 따위의 말로 자신을 위로해 보았습니다.
참, 거절이란 건 마음이 아픈 일이에요.
무릎이 까이듯 마음이 쓰라립니다.
독자분들은 어떤 거절을 당해보셨는지요? 아마 크고 충격적인 뼈아픈 거절의 경험도 있을 것이고, 잔잔하게 매일같이 이어지는 거절의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연인에게 거절을 당한 경험도 있을 것이고, 취업 이력서가 거절을 당한 경험도 있을 것이고, 보다 일상적으로는 커피 한 잔 같이 마시자는 일을 거절당한 일, 여행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일, 브런치 작가분이라면 내 글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일도 있겠지요. 특히나 정성을 쏟은 일에 거절 당하거나, 진심이 담긴 일에 거절을 당하면 오랫동안 마음이 아프고, 가끔은 나 자신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거절당하는 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거절당한다는 건, 사람과 연결되고 관계를 맺고자 한 걸음 나아가는 도전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나의 이력이건, 나의 마음이건, 나의 일부를 떼어서 상대와 나누고자 기꺼이 요청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제안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나의 진심과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용기내어 상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는데 "당신은 나에게 필요없어요."라는 답을 들으면, 내가 이렇게 하찮은가, 나의 일부가 그렇게 가치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한번 거절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정말 가치가 없어서 거절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 결핍된 부분이, 그저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내가 대단히 가치 있는 황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황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받지 않을 겁니다. 이게 내 황금이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내 황금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또는 단순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황금이 필요할 때가 되면, 내 황금을 찾게 되겠지요. 그때에는 제 황금을 기꺼이 받게 될 겁니다.
중요한 건, 타인의 거절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타인이 단순히 그 순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당신의 가치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부정받는 것도 아니지요.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진 황금도 여전히 황금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세상을 만나려고 한 걸음 나아갔던 일, 그것은 절대로 가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용기를 소중히 여겨주세요.
5년 전이었을 겁니다. 저는 당시 웹소설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로맨스 판타지 단편 원고를 써서 투고하는데, 수많은 거절을 당했습니다. 내 실력이 여기까지인가, 내 글은 쓰레기일 뿐인가, 하는 생각에 답답해진 마음으로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아무 계획없이 떠난 여행이라, 딱히 갈 곳도 없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숙소 밖으로 나가기도 싫었죠. 그래도 밖에 나가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숙소 근처에 있던 용두암으로 갔습니다. 그 길을 혼자 자박자박 걸으며 제주도 바다를 보았지요.
참 파랗고 넓더군요.
무성하게 자란 문주란들 옆에서 엉덩이를 깔고 앉아, 저는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 손에 잡힐 듯한 구름들, 하얀 물살을 보며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마땅히 답이 없었어요. 이대로 죽거나, 혹은 살거나였죠. 생수 한 모금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근처에 뭐가 있나 살펴보다 용연구름다리라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햇살은 뜨겁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배는 고프고.
한참을 더 걸어 용연구름다리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눈앞에는 외길로 난 흔들다리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외길로 난 흔들다리가 참 내 삶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으로 빠질 길도 없고, 뒤로 혹은 앞으로 외에는 갈 수 없는 몸!
스스로 세상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누구도 건져주지 않는 삶!
아무리 투고를 해도,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의 문 앞에서, 저는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느냐의 선택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흔들다리를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뒤로 가고 싶지 않다면, 비장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요. 이 걸음이 너무 무겁고 힘들지라도, 수많은 거절 앞에서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도, 자신이 자신을 믿고 무거운 발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또 앞으로.
5년 전, 그렇게 거절을 당하던 저는 결국 단편 작품을 장편으로 바꾸어 플랫폼에 무료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몇 천뷰만 나와도 좋겠다고 생각헸는데, 1만을 찍더니, 5만을 찍고, 10만이 나왔습니다.
용기를 얻고 두 번째 작품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30만뷰가 나왔어요. 인기작에 비하면 형편없이 낮은 조회수였지만, 자신감을 잃었던 저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은 조회수였습니다. 그리고 독자분들의 응원 댓글은 다시 글을 쓸 용기를 주었습니다.
살다 보면, 길은 또 있는 것 같습니다.
A가 거절해도, B나 C를 뚫으면 또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안되면 D나 E를 선택할 수 있더군요. 막다른 골목에 도착하면, 또 막다른 길이 있어요. 최악의 선택지라고 해도, 또 최악의 선택지 나름의 샛길이 있더군요.
쓰린 마음을 안고 한 걸음씩.
자기 안의 가능성을 믿으며, 세상을 향해서.
거절로 상처입은 스스로를 안고 앞으로 걸어나가야만, 그래야 내가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저는 용연구름다리에서 배운 것 같습니다. 이미 세상을 향해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우리는 멈춰 있거나, 뒤로 갈수는 없으니까요.
독자분들은, 언제 어디서 거절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셨는지요?
이 마음이 빛이 되어, 또 내일의 거절로 아플 나 자신을 밝혀주길 바랍니다.
박지아.
편집자.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