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낙성대공원
저는 2주 전에 파주 야당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반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집주인분께서 보증금과 월세를 너무 많이 올리더군요. 결국 서울에서 쫓겨나다시피 부랴부랴 파주로 갔습니다. 직장이 홍대에 있으니 경의중앙선을 타고 다니면 편리했지만, 종종 산책을 가던 낙성대공원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도 듭니다.
2주 전만 해도 저는 브런치 작가를 따놓고만 있었습니다. 탱고 강사를 목표로 하는 내용의 기획서와 몇 편의 글로 어찌저찌 작가는 받았지만, 그밖에 무엇을 써서 올려야 할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감성에세이를 쓰자니, 내 실력이 미치지 않는 것 같고, 정보글이나 자기계발서를 쓰자니 저에겐 타인에게 유용하게 건넬 만한 무엇도 없더군요. 하루하루 고민만 깊어지며, 그렇게 브런치 작가를 장롱면허처럼 박아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번잡한 생각이 풀리지 않아서 답답할 때면 종종 낙성대공원으로 갔습니다. 낙성대역에서 4번 출구로 나와서 좌측으로 주욱 올라가다보면, 작은 성당이 보이고, 교회가 보이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선원이 하나 보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나오는 공원이 낙성대공원입니다.
사실 낙성대공원은 아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생가터입니다. 바로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지요. 거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장군입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라는 별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래서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의 '낙성대(落星垈)'가 이곳 지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낙성대역 지하 플랫폼을 걸으면, 벽화에서부터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낙성대역과 서울대입구역 골목 구석구석에는 강감찬 장군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고, 시기가 되면 강감찬 축제가 열릴 정도로 낙성대에서는 강감찬을 일종의 지역의 마스코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낙성대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멋진 사당(안국사)도 있지요. 옆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더 나아가면 반려견이 뛰어놀게 할 수 있는 운동장이 있습니다. 연못과 운동장 사이의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밭이 나옵니다. 서울대공원 주말농장입니다. 바둑판처럼 구역을 나누고, 상추나 가지나 방울토마토나 금잔화를 심어놓은 걸 보면, 고즈넉한 풍경과 함께 이곳이 서울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이곳을 걸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의 답이 풀릴 것 같기도 하고,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요.
좌우간 글을 쓰려면 뭔가 소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참신한 소재,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했지요.
독특한 직업이 있거나, 남들과는 다른 경험이 있거나, 인생이 특별해야 뭔가 술술 나올 텐데, 저는 도무지 그런 게 없었어요. 출판사 편집자라는 직업에 무난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생활을 한 평범한 직장인이었지요. 특이할 것도, 대단한 경력도, 그렇다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제가 무슨 글을 쓰고, 이걸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여행이라도 할까?"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소재를 얻기 위해서는 여행도 하고, 스터디도 하고, 취미생활을 좀 더 열심히 한다거나, 좌우간 어떻게든 앞으로의 제 인생을 뭔가 '글감이 나올 만한 것'으로 채워가야 했습니다.
글감이 나올 만한 것으로 채워가는 삶!
글이 중심이 되는 삶!
그렇게 되자 자연히 '글을 쓰는 문제'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로 넘어가더군요. 내일과 모레, 한 달 후, 일 년 후, 그리하여 시간이 더 흘렀을 때, 나는 어떤 글을 쓰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말 해외의 오지로 여행이라도 다녀야 할까요?
새로운 취미생활을 만들어야 할까요?
작은 스타트업 출판사라도 경영해야 할까요?
아마, 브런치 작가님들이라면 모두 이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글이 많이 읽힐지, 어떤 글이 라이킷을 많이 받을지, 어떤 글이 독자를 매혹시킬 수 있을지, 어떤 글이 책으로 나올 가치가 있는지 등등.
결국 무엇을 쓰느냐의 질문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만나고, 다들 그 앞에서 치열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쓸까요?
어떻게 살까요?
저는 얼마 전까지 에세이 수업을 들었습니다. 에세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보니 에세이라는 장르를 접하게 됐습니다. 문예창작학과 학부 시절에도 에세이라는 장르를 시도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소설 외길'을 걸었는데, 나이가 30이 되고, 40에 가까워지자 이야기를 짜내는 능력이나 상상력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어요. 점점 내 이야기 외에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이 에세이 수업은, 그러나 제 삶에 정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글ego라는 프로그램에서 만난 제 스승님은 '김유진 작가님'입니다. 에세이집을 몇 권이나 내신 유명한 작가님이시지요. 그분이 수업 내내 강조하신 부분이 있어요.
"에세이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경험일지라도, 그 안에서 티끌 만할지라도 의미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에세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저는 제 인생을 돌아보며 어떤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어요.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고, 그저 출퇴근 하면서 돈 몇 푼 벌어 한 달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과거를 돌아보며, 일상을 꼼꼼하게 살아내며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참 낯설고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저는 그 수업에서 책 한 권을 모두 제 과거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실패했던 일, 절망했던 일, 우울했던 일, 힘들었던 일, 온갖 비참하고 슬픈 일들을 끌어 모아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며 작은 별 같은 반짝임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글이 읽힐까요?
그건 모를 노릇입니다. 다만, 에세이를 쓰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이 안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일, 에세이를 살아가는 그 자체가 저에게는 무척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일상에서 의미를 길어올리는 일.
아마, 다른 감성 에세이를 쓰시는 브런치 작가님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낙성대공원 옆에는 과학전시관이 붙어 있습니다. 그곳 앞마당에는 무척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정말 낙성대공원의 걸작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위세의 배롱나무입니다. 좀 더 여름이 절정에 달해아 꽃을 볼 수 있는데, 그 타오르는 자주색 꽃을 보지 못하고 파주로 떠난 것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독자분들께서 그 배롱나무를 보셨으면 좋겠어요. 노을이 지는 공원에 앉아 산등성이에 단단하게 자라난 배롱나무 꽃을 보는 일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낙성대공원을 배회하던 저는,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철벽 같은 질문 앞에서 어설픈 답을, 마치 길거리에 떨어진 낙엽잎을 줍듯이 손바닥에 쓸어 담았습니다. 그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힌 생각을 안고 자박자박 걸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아름다운 풍광과 그 안에서 건져올린 실낱같은 의미들.
그것이 오롯이 전해지길 바라며, 저는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저의 소중한 브런치 독자님들과 작가님들께 올리는 글입니다. 함께 씁시다. 함께 살아갑시다.
박지아.
편집자.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