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쭉날쭉 출퇴근 시간 이야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안 좋은 상황이었다면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냥 적응해 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하지만, 무언가 좋은 상황을 경험한 후에 그것이 사라진다면, 이전 상황이 더 안 좋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이전 회사를 5년 가까이 다니면서,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는데, 결국 퇴사까지 이어진 것이 출퇴근 시간이다.
1. 출근 시간 9시와 10시 선택 가능.
그곳의 기본 근무시간은 10시부터 7시였다. 하지만 전달 15일까지 신청하면 다음 달부터 9시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출근 시간 변경은 입사 후 3개월(수습 기간 종료 후)부터 가능했다. 하지만 내 경우는 경력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입사 전에도 프리랜서로 같이 일했었기 때문에, 1개월 후 바로 변경해 주었다.
9시 출근과 6시 퇴근은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근무시간이기 때문에, 별다른 불편 없이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놀러 오는 번화가에 있는 회사였기 때문에 6시 퇴근 후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친구를 만나려면 주변의 식당에 가면 되었고, 때마침 오랫동안 배우고 싶었던 유화를 배울 수 있는 학원이 근처에 있어서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9시와 10시로 출근 시간이 나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반반 정도여서 한쪽 시간을 선택한 무리가 소수가 되는 일은 없었다. 또한 점심시간은 출근 시간과 상관없이 모두 1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했는데, 9시 출근자들이 살짝 배고픔을 호소하는 것 외에는 크게 문제는 없었다.
9시 출근이면서 1시 점심시간은 오히려 나에게는 잘 맞았다. 아침을 원래 먹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식욕이 생기는 시간이 조금 늦은 편이라 1시면 적당히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에 매우 좋았다. 게다가 점심 전 4시간, 점심 후 4시간이라는 균형 잡힌 업무 시간이라서 하루의 스케줄을 짜기에도 매우 좋았었다.
2. 출근 시간 9시, 10시, 11시
출근 시간을 11시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지가 늘어났다. 이 공지를 들었을 때, 조금 의아했다. 11시에 출근하면 8시에 퇴근을 한다. 이 시간대는 내가 대학생 때 잠깐 알바를 했었던 면세점의 출근 시간이다. (면세점은 2교대...라기 보다는 영업시간이 길어서 시간을 나눠서 출근한다) 당시 11시에 출근하면서, 출근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절대 11시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직원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지 11시 출근을 선택한 사람은 2명 정도였다.
11시 출근을 신청한 사람이 없으니까, 너무 늦은 출근은 원치 않는다는 것을 회사가 이해해야 했는데, 상황은 조금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3. 플렉스 출근제(9~11시)
출근 시간을 9, 10, 11시로 나눠서 진행하고 나서 몇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또 다른 공지가 올라왔다. 플렉스 출근제를 시행한다는 이야기였다. 9시에서 11시 사이라면, 언제든지 출근해도 괜찮고, 출근한 시간부터 8시간을 근무한 후에 퇴근하면 된다고 했다. 즉, 9시 5분에 출근했다면, 그날의 퇴근 시간은 6시 5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은 동일하게 모두 1시 시작이었고, 모든 회의는 11시~6시 사이에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플렉스 출근제는 진짜 편한 제도였다. 나는 꾸준히 9시 출근을 목표로 했지만, 아침이 너무 힘들었거나 지하철이 밀리는 등 문제가 생겼을 때가 있었다. 플렉스 출근제가 아닐 때는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달렸지만, 플렉스 출근제가 시작되고는 그럴 때 '조금 늦게 퇴근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좋은 제도는 한 달 남짓 시행한 후 폐지되었다. 대표들이 말한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들쭉날쭉 출근해서 제대로 된 회의를 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플렉스 출퇴근제를 시작할 때, 본인들이 '회의 시간은 11시에서 6시 사이에 진행'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모순되는 이야기였다. 덧붙여 말하면, 대표들은 계획성이라고 없는 사람들이라서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사람들을 모아서 회의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플렉스 출퇴근제를 체크하기 위해서 외부 업체(앱)를 이용했는데, 그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플렉스 출퇴근제를 실시할 때, 앱으로 출근 및 퇴근을 신고했는데, 그것을 악용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회사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지하철역 도착)에서 '출근'을 눌렀다는 것이다. 좋은 제도를 주어도 몇몇 사람들로 인해서 결국 다수가 피해를 보는 것이다. 대부분은 성실하게 출퇴근을 신고했지만, 진짜 한두 명 때문에 플렉스 출근제는 사라졌다. 그리고 출근 시간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10시로 고정되었다. 혹시라도 9시 출근을 선택하는 것은 부활할까 했지만, 퇴사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4. 금요일 조기 퇴근(7시 -> 5시)
3번까지 시도한 후, 출퇴근 시간 변경은 더 이상 없었다. 사실 위에 적은 3번까지의 내용은 불과 1년 정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다. 회사를 설립한 지는 5년 정도 되었지만, 제대로 직원을 채용한 것은 내가 입사하기 몇 개월 전부터라고 했다. 그래서 대표들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시기였던 것 같다.
여하튼 10시 출근이라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은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과 배우고 싶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일단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시기였고, 매출도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대표들이 쓸데없이 기획이나 업무에 딴지를 거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 정도 흘렀고, 1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내가 생각했던 일들은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사는 매출이 크게 줄어 많은 사람을 해고(+자진 퇴사)하면서 규모가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내 자리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이직 준비를 했지만, 생각보다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새로운 업무가 생겨서 일단은 회사 내에서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 시기에 대표들이 새로운 결단을 했다. 바로 금요일 2시간 조기 퇴근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2시간 정도 빠르게 가는 게 뭐가 그리 대수냐고 생각했는데, 직접 경험한 2시간 조기 퇴근은 새로운 세계였다. 7시에 퇴근하면 의외로 늦은 시간이라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없다. 하지만 5시 퇴근은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고, 무언가를 배운다고 해도 빠르게 마치고 귀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회사가 이사를 했는데, 지하철만 1시간을 타야 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금요일 조기퇴근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5. 금요일 조기 퇴근 종료
금요일 조기 퇴근은 1년 정도 진행하였고, 어느 날 갑자기 종료되었다. 회사에서 밝힌 이유는 '야근 신청이 늘었다'라는 것이다. 금요일에 5시 퇴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날에 야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인데,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매출 감소로 인해 회사의 인원이 줄기만 했던 상황이라, 한 사람이 감당하는 업무량이 불어났다. 그래서 모두 어쩔 수 없이 야근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5시 조기 퇴근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표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조기 퇴근을 종료시키는 상황에서 직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곳은 금요일에도 여전히 7시까지 일하고 있다.
금요일 조기 퇴근이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퇴사를 했다. 사실 퇴사를 하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 길어져서 매일 출퇴근을 완료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지쳤다. 업무 강도가 높은 편이었기도 하다. 금요일 조기 퇴근이 직접적인 퇴사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겠지만,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회사에 뺏기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이직 준비도, 사이드잡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퇴사를 결심했다.
사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처음부터 10시 출근이었고, 관련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그냥 적응하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직 준비를 하면서 채용 공고에 10시 출근이라고 되어 있어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많은 시도를 했고,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쁜 쪽으로 바뀌었다. 그에 대한 배신감도 좀 생겼다. 출퇴근 제도를 바꿀 때, 대표는 항상 "주 4일제로 바꾸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금요일 조기 퇴근 종료는 그에 반하는 결정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좋은 경험을 한 이후에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나도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크게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