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을 혼자서 다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
"여보, 나갈 때 쓰레기 좀 버려요.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사 와요."
이런 문장을 보면, 대부분은 부부의 일상을 다룬 글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문장은 내가 몸담았던 외국어 교재를 만드는 회사의 교재에 실제로 나와 있는 문장이다. 물론 이 문장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언어는 밝히지 않겠다.)
작은 회사이기 때문에, 교재를 기획하고 집필할 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게 만약 강사 수가 적은 언어라면 더 그렇다. 영어나 일본어 정도는 수요도 많고 강사도 쉽게 섭외할 수 있기 때문에, 강사 1명이 모두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언어의 경우 강사 1명이 교재의 기획부터 집필, 그리고 강의까지 맡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완전히 혼자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 교재이기 때문에 해당 네이티브(강사가 아닌 경우도 많다)의 검수는 무조건 거친다.
이 회사도 한때는 콘텐츠를 만드는 인원이 사원 수의 절반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온라인 강의가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오프라인으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소수 언어도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강사가 직원으로 입사하여 내부에서 기획하고 교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필도 그들의 업무 중 하나였는데, 내부 직원이다 보니 다른 사람(한국인, 콘텐츠 제작 관련 사람 등)의 검수를 거치지 않고 바로 편집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때는 콘텐츠 팀은 있지만, 리더는 따로 없었다. 그리고 검수를 해야 하는 대표들은 바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획까지만 관여하고, 그 이후에는 강사들을 믿고 진행하는 형태였다.
그러다 보니, 앞에 말했던 내용과 같은 문장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 적은 문장의 경우는 한국어 번역이 같이 실려 있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발견한 것인데, 중급 이상의 교재가 되면 교재에는 한국어 번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는 강사가 수업을 통해서 의미를 설명하는데, 수업을 듣지 않는 이상 어떤 문장이 실려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회사 내부에서는 어떤 문장이 들어가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회사에서 출판된 교재들에는 쓴 사람의 성격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몇 가지 내가 발견한 사례를 소개할까 한다.
1. 가족들과의 사이가 안 좋은 유형
: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족과의 사이가 특히 한 구성원과의 사이가 안 좋은 선생님의 경우, 가족과 관련된 문장이 조금 일반인의 생각과는 다른 경우가 있었다.
예시: 아버지는 나를 너무 걱정해서 하루에 50번씩 전화한다.
→ 이 예문은 다행히 교재 편집 전에 발견해서(내가 담당 PM이었다) 수정해서 출판되었지만, 진짜 처음 이 문장을 보고 깜짝 놀라서 계산했다. 하루 24시간을 깨어 있어도 한 시간에 2번 이상 전화해야 말이 되는 숫자이다. 사람은 보통 24시간을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12시간으로 계산하면 한 시간에 4번 이상, 즉 15분에 1번 이상 전화를 한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라도 15분에 1번씩 전화하는 게 가능할까. 아버지에게도 자식에게도 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수정을 요청했지만, 그 선생님은 왜 고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2. 결혼에 집착하는 유형
: 1번과도 좀 연결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가족보다는 '결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실 이 건은 내가 직접 어떤 문장을 발견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고, 학생들과 주변 직원들의 제보로 알게 된 것이다. 강의하시는 선생님은 결혼하신 지 2년 정도 되셨는데, 당시 아이는 없었고 배우자와도 주말에만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결혼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지, 당시 쓰셨던 교재에는 배우자와 관련된 이야기와 결혼 관련 예문이 넘쳐(?) 났고, 심지어 강의 촬영 중에도 배우자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예를 들어가면서 수업해서, 결국 그 내용을 잘라냈다고도 했다.
3. 우울한 문장이 많은 유형
: 이분은 좀 특이한 케이스인데, 어린 시절 외국에서 살다 온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해당 국가의 언어를 꾸준히 공부해서 직접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외국으로 가게 된 상황조차 우울한데(개인사라 밝히지는 않겠다), 현재도 비슷한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분 교재의 한국어 해석을 죽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피곤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어떤 한 문장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있었다.
실제로도 자기 보호가 심하신 분이라 교재나 강의에 대한 피드백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었지만, 강의는 매우 달랐었다. 같이 강의하는 원어민과의 케미도 정말 좋아서 밝고 통통 튀는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강의였기 때문에 한번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모조리 팬이 되었다. 그중에는 정말 광팬이 되어서 그 선생님의 강의를 전부 듣는 경우도 많았다.
4. 예문이 전부 학업인 유형
: 우리가 만드는 교재는 모두 성인 대상이다. 물론, 학습자를 가려서 받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재로 공부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일단 타겟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돈으로 교재를 구매해 외국어를 공부하려는 성인'이다. 그래서 예문에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문장이라거나, 아니면 술이나 담배에 대한 문장도 있다.
그런데 오랜 기간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하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경력이 좋았기 때문에 내부에서도 매우 기대가 컸고, 바로 대형 교재의 집필을 맡겼다. 그런데 그분의 원고를 훑어보는데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수학은 어렵지만,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숙제를 깜박해서 선생님께 혼났어요." 같은 예문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적절한 예문일 수 있겠지만, 성인들에게는 그다지 맞지 않는 느낌이라서 그래서 피드백으로 '예문이 성인 대상으로는 조금 맞지 않아요. 수정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더니, 도리어 어떤 부분이 이상하냐고 물어서 설명해 주기도 했다. 수정하기는 했지만 그 선생님은 결국 이해하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특히 요즘에는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에서 개인을 드러낼 때의 이야기다. 나도 이렇게 브런치를 쓰고 있을 때는 내 생각이나 개성을 최대한 드러내고 노력한다. 하지만 교재를 집필할 때는 달랐다.
교재는 말 그대로 교육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국어 교재라면 배워야 하는 어휘나 문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교재들의 예문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우리 교재를 집필한 선생님들은 다른 교재와 차별점을 두기 위해서 고심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문장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이 너무 진하게 드러나면서 교재 문장이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장들을 잘 다듬기 위해서는 원고를 집필한 이후, 다른 강사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균형을 이루는 감수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 회사에서는 감수는 무조건 외국어 감수만을 뜻했다. 즉, 문장의 의미보다는 문법이 맞는지, 오타는 없는지를 확인하는 과정만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래도 교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교재 예문에 대한 조금 더 치밀한 논의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원고가 뚝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업무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원고 집필에 주는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특히 내부 직원의 경우에는 "원고 집필 외에는 하는 일이 없잖아. 왜 원고를 못 쓰는 거야?"라고 타박을 주기까지 했었다. 직원들이 회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너무나 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원고를 쓰다 보면 매번 같은 스피드가 나지 않는데, 항상 최고의 스피드를 유지하라고 하는 부분이 좀 힘들었었다.
지금은 AI가 있기 때문에, 강사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예문이 더 적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내가 일했던 회사에서 말이다. AI가 있는데, 원고를 왜 못 쓰냐는 타박이 더 늘어나겠지. 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재라는 것은 AI의 도움이 있으면 조금 더 빠르고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결국 좋은 문장, 교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