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민 Aug 18. 2023

엄마가 없을 때 이모가 엄마 대신이야

이제까지 난 ‘이모’라는 단어의 한자를 잘못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이모의 한자는 ‘다를 이(異)’자를 써서,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 엄마와 다른 사람. 또는 엄마를 대신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정확히는 엄마의 여자자매를 뜻하는 ‘이모 이(姨)’자를 쓴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닌 사람 중에 엄마를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와, 나, 그리고 엄마의 여자 형제들과 촌수 구분 정도의 의미였던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을 했지’하고 돌이켜보니 그건 예전에 이모와 한 대화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때는 1997년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은 좀 안되고 20년은 좀 넘은 그 전의 일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중2병’이라는 단어도 개념도 없던 그 시절에 나는 심한 사춘기의 파도 한가운데에 있었다. 비극에서 사건은 함께 몰려오는 것처럼 그때의 우리 집에는 나쁜 일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가족 모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 안에서 나는 폭풍 속 고요를 느끼며 철저히 혼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생각했고 실제로 모두들 살기 바빴다. 그 시간 속에서 관심 타령하는 것은 굉장히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되기 일쑤였고, 철없을 나이에 철이 들어야 했던 나는 속으로 병이 날 것 같았다. 비행 청소년은 아니었지만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그럴수록 가족과의 불화도 심해졌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상처받는 사람만 계속 나오는 그런 상황이었다. 매일 남몰래 울었고 매일 누군가와 싸웠다. 어쩌면 누군가와 싸운 게 다름 아닌 내 안의 다른 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때마침 시절도 한참 어려운 IMF의 시기였고,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지 몇 년 안 되었기 때문에 가까웠던 친척들도 모두 흩어져 점점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하루는 걸걸한 목소리의 청년이 전화를 하길래 누구냐고 물어보니 동생도 못 알아보냐는 사촌 동생의 타박이 돌아왔다.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라고 변해갔던 것이다. 키가 크고 변성기가 왔다. 말하지 않으면, 길에서 지나가면 서로를 못 알아볼 정도로 아이들은 그렇게 커갔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 같아도 어떤 시기에는 두 배속을 돌리는 것처럼 빠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저 시기의 탓이긴 하지만.


그런데 하필 그날이었다. 때는 덥고 더운 중학생의 여름방학.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샛노란 머리를 하고 온 그날. 변성기의 사촌 동생과 둘째 이모가 집에 왔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더운 그 여름날 나는 엄마의 속에 기름을 부었다. 엄마는 내 머리꼴을 보고 창피함과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보는 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화를 버럭 내고 나가버렸다. 모두가 쭈뼛대고 있을 때 울고 있는 내게 이모가 다가와 나를 따로 부르더니 말을 했다. “이모가 봐도 노란 머리는 엄마가 화낼만하다. 말이라도 하고 하지 그랬어.”라며 주머니 속에서 용돈을 쥐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 돈으로 나중에 학교 갈 때는 염색하고. 이미 한 거는 한 거니까. 예쁘게 하고 다니고. 엄마가 없을 땐 이모가 엄마 대신이야. 엄마랑 말하기 힘들 땐 이모한테 말해”라고 말이다.


삼십 년이 지나고 이제는 아이 엄마가 되어 아이와 함께 이모를 만났을 때 그때 이야기를 했다. 이모는 “그랬었나?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이모가 엄마지~”라며 웃었다. 나도 아이도 이모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의 아이에게 많은 이모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엄마 ‘대신’들이 많다는 것. 그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

엄마에게는 여자 동생이 셋, 그러니까 나의 친이모 들은 셋이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온 그들은 뚜렷한 개성으로 나를 사로잡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나를 사랑했다. 화통한 성격에 시원시원하지만 어딘가 코드가 나랑 잘 맞는 엄마의 첫째 동생 첫째 이모, 언제나 상냥하게 우리를 챙겨주는 둘째 이모, 그리고 엄마와 가장 나이가 많이 차이나지만 나와 가장 적게 나이 차이가 났던 큰 언니 같았던 막내 이모. 그중 막내 이모는 어린 시절 같이 살기도 했었어서 특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막내 이모가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말로만 듣던 지구 반대편, 이모는 가정을 꾸리려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곤 3년에 한 번, 5년에 한 번,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또 한 번. 만남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져만 갔다. 그런 이모에게 사실은 내 책이 나왔어하고 연락을 하게 됐다.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이모는 내 책을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만나고 싶어 했고 드디어 만났다. 이제 네 살과 서른 살의 사람들은 마흔 살과 육십 살의 어른이 되었다. 육십 살의 막내 이모는 마흔 살의 조카를 떠나면서 용돈을 쥐어줬다. “옆에 살면 해 줄게 많을 텐데. 지금은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나는 염치없게 그 돈을 날름 받았다. 안 받는 게 나한테는 훨씬 편한 일이었지만 주는 이모한테는 내가 선선히 받는 편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이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또 이별했다. 그리고 이제는 메시지로 가끔 이야기를 나눈다. “쑥쑥이가 동그란 안경 이모할머니 보고 싶다 그러네~” “그래? 나도 보고 싶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