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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Aug 22. 2023

내 꿈은 수영하는 할머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다. 우연히도 모두 초등학교 3,4학년때의 일들이다. 두 번다 정신을 잃었었고 또 금방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첫 번째 사건은 체육 시간이었다. 유난히 겁이 많았던 나는 반에서 거의 유일하게 철봉돌기를 못하는 어린이였다. 딱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친구들의 도발에 나도 모르게 철봉에 올라 있었다. 여러 친구들의 응원과 코치를 받으며 열심히 돌았다. 아니 돌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그렇지” 소리에 신이 났던 나는 힘주어 돌기를 시도하다 그대로 모래밭에 내다 꽂혔다.


삐——. 잠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반 아이들이 나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쳐다보는 게 보였다. “아이 깜짝 놀랐네. 야! 한참 떠 있는데 거기서 손을 놓으면 어떡해!”라는 타박의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짧은 시간 동안의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사람이 정신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정말 순간이라는 게 길게도 느껴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 짧았던 지난 생일 다 스쳐갔기 때문이다. 정말 영화처럼. 이런 일은 또 없을 줄 알았는데 금방 일어나고 말았다.


때는 한 여름이라 학교에서 전교생이 다 같이 일주일간 수영 강습을 받으러 갔었다. 평소 물을 무서워해서 정말 가기 싫었는데 열외 없이 단체로 가는 것이라 끌려가듯 간 기억이 난다. 적당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야지 하고 구석에 있었는데 벌써 표정부터 장난을 머금고 다가오는  한 아이가 있었다. “야, 수영 배우러 왔으면 해야지~”하면서 내 몸을 들었다. 발버둥 치는 나를 데리고 아이는 열심히 나를 바닥에서 나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럴수록 당황한 나의 발버둥은 심해졌는데 아이는 ‘에잇, 힘들다. 모르겠다’하고 발버둥 치는 나를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깊지도 않은 물에 나는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오지 못했다.


이를 알아챈 선생님이 마치 동화 속 왕자님처럼 나를 구해냈다. 그게 문제였다. 선생님이 왕자님처럼 보인 것. 현실은 사고 날까 봐 조마조마했던 선생님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왕자님이었다. 그 후로 그 왕자님은 남은 기간 동안 나를 특별히 신경 쓰며 지켜 주었다. 수영도 더 시키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여러모로 아이들이 보기에는 꼴사나워 보였었나 보다. 질투의 말이 화살처럼 꽂혔고 나는 한시적이지만 왕따가 되었다. 즐거웠던 수영장으로의 소풍은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을 남겼다.


그 때문인지 ‘수영’하면 그런 단어가 떠오른다. 생존, 위험, 왕따, 질투… 그래서 그 이후에 수영장이나 워터파크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 안에서 기억을 잃은 기억과 그렇게 돌아왔지만 나를 반겨준 사람이 없다는 게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가끔씩 들르는 체육관에서 삼삼오오 모여 수영을 하고 그 수영을 등록하기 위해 오프런을 불사하는 어른들을 보면 왠지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들의 건강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생기 넘침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래서 자꾸만 미루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무서움을 깨부수고 나도 저렇게 빛나는 어른 중에 한 명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할 수 있을까. 수영하는 아줌마 혹은 수영하는 할머니. 그날을 위해 오늘도 준비 운동부터 한번…


*

지금 어디 계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때 수영장에서 나를 구해준 선생님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꼭 하고 싶었다. 젊디 젊은 청년에게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선생님이 구해줘서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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