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날 짓밟았어. 하나 남은 꿈도 빼앗아 갔어’라고 다소 과격하게 외치던 아이돌이 있었다. 중1 소녀에게 그런 과격하지만 박력 있는 메시지는 당시의 나와는 해당 없는 삶임에도 알게 모르게 과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또 그 시절에는 1세대 아이돌이 태동하는 시기였는데, 누구나 좋아하는 아이돌이 한 팀, 한 명쯤은 있었고, 그 시절 아이들의 루틴이자 스몰 토크와 빅토크의 주제 대부분도 각자의 최애 아이돌이었다. 그 루틴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스마트폰은커녕 핸드폰도 아니고 삐삐가 보편화된 시절이었기에, 매일 아침 친구들과 다 같이 공중전화로 몰려가 ‘사서함’으로 전화를 한다. 그럼 누가 들어도 엔터 회사 직원인듯한 20대로 추정되는 딱히 의욕은 없지만 단전에서부터 의욕을 싹싹 모은듯한 한 언니가 최대한 노력해서 만들어낸 명랑한 목소리로 “우리 오빠들은 오늘요~”라며 한 주간 예정된 스케줄을 정리해서 알려 준다.
대부분 언제 어디서 무슨 방송이 나오는지 알려주는 게 대부분인데 가끔 사인회를 한다거나 행사를 한다는 정보다. 그렇게 귀로 모아 모은 정보들을 오빠들 사진을 붙이고 만들고 꾸민 필통에서 펜을 꺼내 적는다. 방과 후엔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에 하나씩 있었던 아이돌 전문 문구점에 갔는데 거기엔 오빠들 사진이 매주 업데이트됐다. 한 장에 400원. 멤버당 10종 이상 나올 때도 많고, 요즘으로 치면 ‘최애’ 멤버가 아니더라도, 같은 그룹 타 멤버 것도 종종 샀기 때문에 만 원 정도는 금방 날아가기 일쑤였지만 그 시절 포기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어쩌면 이것이 포카의 시초?) 그러고도 뭐가 모자란 지 쉬는 시간이면 모여 어제 봤던 티브이 얘기, 라디오 얘기 또는 ~카더라 얘기. 더 나아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틀어놓고 춤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응답하라 1997>은 다큐나 다름없다. 한 반에 몇 명씩 **부인이 있었고, 놀랍게도 그들은 평화롭게(?) 연대했다. **부인들은 오빠들의 스캔들에 같이 분노하고 울었고, 같이 누군가의 눈알에 색칠을 했다(!!!). 과격하고 저돌적이었지만 그만큼 순진한 구석도 있었다. **부인들은 유난히 더 친해져서 절친이 되기도 쉬웠으니 친구들이랑 친해지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오빠들의 인화 사진 전용 앨범을 뒤적이며 주머니는 가볍지만 즐거운 덕질을 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유치 하지만 발랄했고 그러면서도 이상한 그런 시기였다.
그날도 열심히 덕질을 하며 우리 오빠들이 나온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다.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디제이의 말에 오빠가 말씀하셨다(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전체적인 내용을 재구성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요. 팬들은 돈이 어디서 나는 거예요? 대부분 용돈이죠? 그럼 부모님이 주시는 거고요? 사진 사려고 전단지 알바 같은 것도 한다고요? 음…”
침묵이 있으면 안 되는 라디오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러분, 그렇게까진 하지 마세요. 돈 아껴 쓰세요. 용돈은 자신한테 쓰세요. 저한테 쓰지 말고요. 정확히는 저에 관련된 건 적당히 사시라는 뜻이에요”
네?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빠 것 사면 좋은 것 아닌가요? 싶은 마음이 들 때 그가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 용돈 부모님이 열심히 일해서 주시는 것이에요. 그런 걸 가치 있는데 써야죠. 적당히 쓰고 자신한테도 쓰세요.”
14세의 나는 나름 충격을 받았다. 그림 속 사람 같아서 멀리 있는 것 같은 ‘우리 오빠’가 ‘우리’를 걱정하고 자기 자신에게 더 투자하고 쓰라고 한다. 돈이든 시간이든.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우리 오빠가 우리를 걱정해 주고 생각해 준다는 그 자체에 그저 좋아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보니 스무 살 남짓의 어린 아이돌의 걱정 어린 조언은 어쩌면 꼰대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나름 진정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수익 구조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걱정해 주는 마음. 어린 마음에도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그런 마음은 충분히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21세기가 되고도 한참 지나 더 이상 지금의 틴에이저에게 하이파이브 따윈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재결성이 기쁘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했다. 나는 이미 그 시절의 열네 살이 아니고 마음으로라도 그 시절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미 그 시절을 너무 멀리 떠나보낸 기분이다. 하지만 그래도 힘들었던 청소년기의 위로가 되어 준 그 오빠들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고 팬들을 걱정해서 해 준 그 마음씨가 고맙긴 하다. 그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때론 팬심을 배신하고 나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오빠들이 세상엔 너무 많았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의 지난 시간까지 부정하게 되기 쉬운데 내가 좋아했던 나의 그 오빠가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서 오히려 팬들을 걱정해 준 사람이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그 오빠에게도, 별 사고 없이 잘 살아준 지금의 그 오빠에게도 하고 싶은 말, 잘 살아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