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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Aug 29. 2023

성추행은 명백히 나쁜 거예요, 아저씨

“저 **놈의 *끼가! 어디라고 눈깔을 부라려. 어디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 **새*”

그날은 아주 덥고 더운 여름날의 지하철 문 앞에 있던 날이다.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하하 호호 지하철이 떠나가라 친구와 웃었던 것 같다. 마침 사람도 별로 없고 해서 그 정도 떠드는 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 어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더군다나 할머니의 눈빛은 좋지 않다. 어딘가 째려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그 눈빛이 나를 향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싶어 친구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생각하며 다시 집중했다. 그때였다. 어딘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진 게. 이상하게 그런 순간이 몇 번 더 있었다. 그러다 강력하게 뭔가가 나를 치고 나갔다.


엇어?!! 누가 나를 치고 갔나? 그것도 엉덩이를? 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돌아봤는데 누군가 나를 밀치고 다음역으로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그리고 지하철 문이 닫혔다. 나를 치고 간 그 아저씨는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으니 아까 나를 쳐다본 것인지 긴가민가했던 할머니가 밖을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저 **놈의 *끼가! 어디라고 눈깔을 부라려. 어디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 **새*”

정차역에서 문이 닫히고 열리는 그 찰나의 사이에 욕 하는 할머니, 노려보는 아저씨, 어리둥절한 친구, 옆에서 같이 그러나 다른 의미로 어리둥절한 나, 네 사람의 시선이 오갔다. 할머니는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욕을 했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시더니 나와 친구를 보고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그 미췬 놈이 하는 짓이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보고 있었는데. 저러고 내 빼네”

지금까지의 이상한 느낌과 상황이 한 번에 정리됐다. 성추행이란 것이 그렇다. 당시에는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기 어렵고 인지한다 해도 사람을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기분 나쁜 힘이 있다. 그런 얼음 같은 순간을 할머니가 나타나 슈퍼맨처럼 깨부숴줬다. 추행당한 사건 자체는 변하지 않아도 이렇게 상황을 이해시켜 주고 괜찮다 말해주고 대신 싸워주고 화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 후로 성추행 같은 건 한 번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결말지어졌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날 이후에도 내 주변에서 성추행은 드물지만 계속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물러설 때도 있었지만 그때의 할머니처럼 대응한 적도 있다. 그때의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을 것이다. 일어난 일 자체를 없었던 것처럼, 마치 시공간을 점프한 것처럼 없었던 일인 양 행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변화하려면 그것도 나아가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만약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겠으면 소리라도 질러야 하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부터 해야 바뀐다. 나는 그날 할머니에게서 그것을 배웠다. 소리를 내고 욕을 해서 그 공기를 부수는 일. 불의에 화낼 수 있는 것. 그것.



*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바바리맨을 무시하고 지나간 적이 있다. 아주 더웠던 중학교 여름 방학 중 하루, 방학 중 한 번씩 돌아가며 나오는 청소당번이 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쌩~하고 자전거 한 대가 내 옆으로 지나가는 것 같더니 속도를 늦춰 내 발걸음에 맞춰 다가오듯 주행을 했다. 넓디넓은 도로에서, 그것도 내 보폭에 맞춰 가던 속도를 줄이면서까지 왜 내 옆 방향으로 왔는지 아주 잠시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학교에 가고자 했던 명확한 목표를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던 길을 재촉하며 앞만 보며 걸어갔다. 무표정한 얼굴에 당당한 걸음걸이. 이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자전거맨의 시선을 느낀 찰나, 자전거는 휙~ 하고 속도를 내 앞으로 지나갔고 2~3분쯤 뒤 길 앞쪽에서 “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전거 위로 흩날리는 바바리를 보고 방금 전 든 의문이 풀렸다. 자전거맨인 줄 알았던 이는 바바리맨이었는데 이 날의 사연은 때마침 소리를 지르고 있던 한 친구의 제보로 라디오에 소개되기까지 했다. 이 황당한 사건에서 현장에는 있었지만 안 본 눈을 가진 이는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황하지 않은 사람도 나뿐이었다. 당황하지 않는 나를 보고 당황한 바바리맨이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당황하는 아이들에게 찾아간 것이다. 내가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바바리맨은 거기서 그 짓을 끝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아이들을 찾아갔을까. 만약 앞에 있었던 아이들도 쌩하고 지나갔었다면 또 다른 아이들을 찾아가진 않았을까. 성추행에는 여러 패턴이 있어서 이런 류의 보여주기 추행에는 무반응이 제일 효과적이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때 경험을 봐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놀라지 않고 웃지 않고 무시하는 것. 반사적으로 나오는 그 놀람 버튼을 애써 누르고 침착함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니 그런 일 안 하게 알아서 안 보여줬으면. 제발… 안물안궁안보(고싶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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