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육아의 최고 선생님은 미디어, sns다. 아이를 키울 때 가장 난감했던 게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대부분 상충되는 말이 많아서 어떤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입김 센 경력자들의 말에 쉽게 휘둘리기도 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론 말해준 이의 의도와 다르게 나를 피폐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 대신 전문가의 조언을 기준으로 삼되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 나가기로 했는데 그중 도움이 됐던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듯한 금쪽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 애가 아직 어렸기에 금쪽인지 은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생과 육아의 미리 보기로 삼아 몇 편씩 시청했다. 그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한 다문화가정에서의 엄마와 아이의 대화였다. 아이는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낮은 점수를 받아 침울해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이 집은 애가 셋) 엄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정한 말을 건넸다. “돈 비 새드, 스윗하트” 이 말 한마디에 티브이 앞에 있던 나도 스윗하트가 되어 눈 녹듯 야들야들해진 마음으로 그 모녀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나도 나중에 따라 하고 싶어 져서.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이는 이 외국인 엄마가 한국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야, 너! 엄마가 그거 하지 말랬지” 나는 또 티브이 앞에서 얼음이 되어 눈만 껌뻑껌뻑하며 그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왜 그랬냐는 패널의 질문에 “한국말은 빨라요.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느낌이 살아요” 맞는 말이다. 마흔 가까이의 인생을 살면서 본 많은 부모 및 보호자의 말은 거의 “야!”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지시사항이 있었다. 이 외국인 엄마라고 다르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한국패치된 상태.
돌이켜 보면 나도 “야”란 말을 많이 들었다. 엄마는 물론이고 학교 선생님, 친구, 지나가는 사람에게까지. 그런데 이 ‘야!’라는 단어에는 묘한 힘이 있다. 어떨 때는 친근한 친구 사이를 반영하기도 하고, 위 사례와 같이 부모 자식 간 대화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도 하고, 누군가를 하대할 때 쓰기도 한다. 단어에는 잘못이 없겠지만 대부분 유쾌한 상황에서 쓴 적은 극히 드물었던 것 같다. 특히 일하는 관계에서는 그랬다. ‘야’라고 부르는 상사 또는 동료 치고 좋은 사람을 못 봤다. 그들은 언뜻 보기엔 마치 한 둥지에 있는 식구 같았지만 사실 알을 깨고 나온 순간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둥지 속 다른 이들을 밀어 떨어뜨리기 바쁜 뻐꾸기 같은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생존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제나 가차 없이 행동했다. 그것에 대한 태도가 묻어 나오는 게 저 ‘야’라는 한 음절의 단어에서부터였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서부턴 그 누구에게도 ‘야’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하지 않는다. 누가 됐든 최대한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있는데 굳이 ‘야’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야’라고 부르면 대답하지 않는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름을 부를 때만 응답한다. 그 대신 이름을 불러준 이에게는 웃으며 화답한다. 누군가의 시처럼 그에게 가서 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러니 어른들이여, 아이들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자.
따뜻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돈비새드 스윗하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