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민 Sep 07. 2023

마흔 살에도 어른 친구가 필요해

오빠와 나는 세 살 차이가 난다. 고로 내가 한 살 때 오빠는 네 살이었단 말이 된다. 그렇게 내가 첫돌도 안 지났지만 한국 나이로는 한 살 정도 됐을 시절, 엄마는 피곤에 절어 나를 안고 잠이 들었다 한다. 그때 네 살 오빠가 나타나 엄마의 눈을 쑤셨다고 한다. 정확히는 쑤셨다기보단 두 손가락으로 열어젖혔다는 표현이 맞겠다. “엄마 왜 눈을 감고 있어? 눈을 떠야지” 네 살 눈에는 대낮에 졸고 있는 엄마가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엄마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게 그저 웃긴 일만은 아니란 건 내가 애를 낳고 알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두 시간에 한 번씩 뭔가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두 시간이란 하루 24시간 동일하게 돌아가는데 저녁이든 새벽이든 관계없이 하루 12번의 로테이션을 돌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하필 나의 아이는 3킬로그램도 안 되는 유난히 작은 아이였다. 도저히 뭔가를 먹을 힘이 없었다. 그저 입만 벌리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분유를 열심히 타서 갖다 주고 그냥 꿀떡꿀떡 삼키키만 하면 되는데도 그랬다(분유 준비에 물 끓이기, 분유 타기, 분유 식히기 포함 10~15분). 그럼 애써 탄 30분 동안 달래고 달래 정량을 먹인다(여기까지 40~50분). 작았던 아이는 트림도 잘 못했다. 그래서 트림도 계속 시켜주거나 소화가 될 때까지 안고 있어야 했다. 그게 30분 걸렸다. 자, 지금까지 약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럼 또 애를 재워야 한다. 이게 또 30분 걸렸다. 30분 뒤에는 자는 애를 다시 깨워 아까 한 그 일을 계속한다. 그 사이 분유도 미리 타 나와야 한다. 그럼 아이가 자는 동안 내가 쉬는 시간은 15분이 될까 말까 한다. 이 일을 10번에서 12번… 이 시기의 아이에게 먹는 시간, 자는 시간, 쉬는 시간은 딱히 나눠져 있지도 않고 나눈다 해도 의미가 없다. 다행히 아이가 커가면서 2시간이었던 식사 시간 텀은 3시간, 4시간으로 점점 길어졌고 아이도 나도 그 생활에 적응되긴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꽤나 애를 먹었다.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게 내 눈물인지 콧물인지 땀인지 아기 침인지 토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매일 울었고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지난 시간 오빠가 엄마가 눈을 쑤시던 그날처럼 나도 아이를 안고 잠이 들기 일쑤였다.


회사의 배려로 출산휴가를 남들 쓰는 3개월이 아닌 1달 더 받아 4개월을 받게 되었다. 아이와의 일상이 뼈를 깎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새로운 일상을 추가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니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은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다가올 미래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실이 급했기에 억지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절대 성공하지 않을 것 같은 회사로의 복귀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서툴지만 엄마의 역할도 직장인으로의 역할도 하나씩 해 나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사이 아이도 크게 아픈 데 없이 잘 자라 주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전까지는.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깨우는 몸짓을 느꼈다. 누군가가 정확히 내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 아이와 단 둘이 자던 시기라 ‘나를 깨울 사람이 없을 텐데’ 희한한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피나” 아이가 감은 눈으로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닦아줘”라는 말에 얼른 불을 켜서 봤는데 온 이불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피를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아이를 닦아주었다. 아이는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렸고 더 이상 피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피가 나왔나 했더니 검지손가락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걸 웃어야 되는 건지 울어야 되는 건지. 어린 사람의 몸에서 정확히는 코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저렇게 쿨쿨 잘 자는 아이에 모습에 황당함을 느꼈다. 그게 새벽 세시쯤이었다. 잠깐의 해프닝이었지만 나는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놀란 데다 어이없는 상황에 이른바 ‘현타’가 몰려왔다. 누워 있어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적다보다 내 인생이긴 했는데 나의 ‘직업적 인생’ 이야기가 많았다. 앉은자리에서 차례를 만들고 정리했다.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차례까지 정리가 됐으니 한번 써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그 이후 아이가 잠들고 새벽 시간이 되면 틈틈이 글을 썼다. 정확히는 차례에 있는 내용을 하나씩 채워 나갔다. 어쩌다 보니 1장을 다 쓰게 되어 내용을 정리한 후 투고를 해보기로 했다. 회사에 있으면서 투고 원고가 들어온 것도 많이 봤었고 그중에는 간절하게 원고가 책으로 완성되길 바라는 글도 많았지만, 일단 보내는 봅니다~라는 투고의 글도 많았었기에 나도 반쯤은 그런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투고를 해나갔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책을 계약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이 나에게도!라는 생각이 들며 기쁜 마음으로 내 책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할 무렵 딱 한 번만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저어기… 죄송한 말씀이지만, 추천사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해 둔 분들이 있는데요” 초짜 작가의 당돌한 요구에도 다행히 출판사는 귀를 기울여줬다. 그리고 내가 원한 그 이름을 꺼냈다.

“저어기… 번역가 선생님 중에 *** 선생님이라고 계신데… 그분 에세이를 출산하고 다 읽었었거든요… 글을 쓸 힘을 그때 얻은 것 같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나의 진심이 조금은 통했던 것인지 선생님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셨다. 선생님은 실제로 추천사를 써주신 적은 단 두 번이라고 한다. 아마 내 글을 읽고 알 수 없는(?) 짠함을 느껴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염치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짠함도 쓸모가 있다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얼마 후 멋진 추천사가 내 손에 들어왔다. 모든 문장이 마음에 들어 출판사 대표님을 졸라 전문을 책 안에 넣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추천사와 그 추천사를 책 안에 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두 번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쁘게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책을 출간하고 바쁘지 않으면서도 바쁜 날들을 보내던 와중 sns에서 글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나의 추천사를 써주신 ***선생님께서 우리 옆 동 작은 동네 서점에서 하는 북토크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너무 기쁜 소식이었지만 알 수 없는 소심함 때문에 가는 날까지도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 ‘인생은 일단 go!’를 외치며 뻔뻔하게 행사장인 서점으로 들어갔다. 작은 동네 서점에서 여는 행사여서 그런지 옆자리 사람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공간과 특유의 무드가 있었다. 덕분에 너무 긴장되긴 했어도 나름 즐겁게 잘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재미없으신가 봐요”라며 나에게 말을 거셨다. “네??? 아니요. 너무 재밌어요!!!” 긴장한 얼굴이 티가 났나 보다. 굳은 얼굴은 펴질지 모르고 그 짧은 사이 분위기 깨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가 쌓이고 있었다. 재밌지만 어색한 북토크 자리가 끝나고 책을 사인받는 시간에 슬며시 말을 걸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말에 “저어기… 저한테 추천사를 써 주셨….”  “!” “?” “!”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 만났다. 선생님은 태어나서 처음 한 북토 크여서 긴장을 많이 하셨는데 왠지 모를 동네의 독서 고수가 나타난 줄 알고 긴장하셨다고 한다. 마치 ‘어디 한 번 해봐’라는 포스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색한 오해를 풀고 우리는 블로그 친구가 되어 한 번씩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과 나는 같은 **대로를 타고 살고 있었으며 1994년 같은 공간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친구라고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고 나보다 어른이지만 그래도 마흔 살인 나에게도 고민이나 생각을 편하게 말하고 싶은 어른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그런 분이 되셨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한 번씩 블로그에 인사를 나누러 간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말이다.


*

어릴 땐 매일 만나고 시시콜콜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친구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자주 보냐 현피(?)를 뜨냐 안 뜨냐 그런 문제가 아니다. 10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갑고 온라인에서 말해도 마음 편히 말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시공간을 초월해서 지지고 볶는 사이도 있다. 점점 제한이 없어지고 형태도 달라진다. 그래도 변치 않은 것은 친구라는 넓은 반경에 있고 싶고 넣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이가 들어 친구가 더 많아졌다. 비록 어제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말하던 그 시절의 친구와 같진 않아도 즐겁게 수다를 떤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하루가 즐겁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