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워있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누워서 먹고 자고 다 가능한 인간이다. 그러고 다시 자고… 농담이 아니라 그럴 수 있었던 시기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몇 날 며칠을 집에서만, 아니 방안에만 있어도 괜찮은. 더우나 추우나 이불은 필수. 이불속 세상은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게다가 잠까지 잘자면 굳굳. 그런 천생 히키코모리 같은 나일지라도 일상을 누리고 아이를 키우고 삶을 살려면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 나가는 것이므로 언제나 이불속 세상을 꿈꾸고 있다.
책이란 건 또 얼마나 좋은 것인가. 이불속에서 책을 펼치는 것은 좋은 것에 좋은 것. 기쁨 두 배의 일이다. 이불속에 책을 꺼내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치 저자와 통신하듯 연결되기도 끊어지기도 한다. 그가 생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저자가 남긴 기록이 서로를 연결해 주다. 언제든지. 그런 의미에서 책은 통신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평화가 깨진 것은 내가 나이를 먹어서도 있지만 출산이라는 천둥 같은 변화를 거치면서부터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게 생각보다 신생아는 잠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잠은 많이 자지만 끊어서 잔다. 그 주기는 생각보다 짧았다. 잠자리 투정도 대단하다. 진자리 마른자리 잘 살펴줘서 쾌적해야만 잠자리에 드신다. 그것도 한 시간짜리. 도저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에잇 하고 모른 척 깊은 잠을 청하기엔 아이는 너무 연약하고 물렁물렁하고 온 힘을 다해 울어댄다. 그 모습이 너무 불타는 고구마 같기도 하고 이 불타는 고구마님을 어떻게든 재워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 년을 보내고 나니 손목가지가 시큰하기 시작했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가 말해주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10개월이 지나면 많이들 병원에 오세요. 그때쯤 되면 아이도 세상에 적응한 뒤라서 엄마의 몸도 아이의 몸도 출산하면서 받은 면역력을 다 소진하는 시기예요.” 너의 임무를 끝냈으니 너의 면역력은 내가 다시 가져가지.라는 것 정도 되는 것이다. 면역력도 체력도 바닥났다.
그전에는 신나게 누워서 놀았다면 이제는 생존하려고 눕게 되었다. 육아 공동체와 육아의 정점에 있는 아이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누워서 얘기하고 누워서 책 읽고 누워서 티브이를 봤다. 서서히 아이도 누워서 먹기까지 했다. 어른이 온종일 누워있으니 아이 입장에서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정도로 누워있는 게 너무 자연스러우니 휴식이었던 잠도 누워있는 것도 더 이상 휴식이 아닌 게 되었다. 몸은 더 무거워지고 게을러졌다. 무릎도 허리도 아프다. 중력을 거스를수록 더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기 뒷동산 산책도 에베레스트 등반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되었다. 그렇게 누워 있는데 아이가 말을 했다. “엄마, 우리 산에 가자” @.@ 아이의 말에는 무조건 ‘예스!’를 남발하던 타칭 ‘칭찬봇’, ‘예스봇’인 나인데도 선선히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엄마 산에 가자니까. 나 산에 가는 거 좋아해” “아? 그래? 그럼 날 좀 시원해지면 가자”라고 하니 남편이 “오~ 진짜?”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날부터였다. 쿠*으로 스텝퍼(제자리 걷기 운동기구)를 주문하고 일어나자마자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튀어나가 한 시간씩 스텝퍼를 밟았다. 그 한 시간 동안 남도 원망해 보고 슬퍼도 해보고 웃기도 해보고 별짓을 다 했던 것 같다. 감정의 파도에 내 다리까지 맡기고 그저 그렇게 움직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운동을 하고 죽을 것 같은 30분쯤 지나면 몸은 엄청 힘든데 마음속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 매일 아침 ‘아 진짜 하기 싫은데’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운동을 했다. 그래서일까. 그 덕분인지 세네 시간의 출근시간에도 무릎이 덜 아프기 시작했고 슬슬 체력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집에서도 가능하면 눕지 않고 앉아있었다. 그러니 자기 바로 직전에 누운 그 순간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아, 이거지. 이것이 자는 것이지’
어릴 때는 그러니까 청춘 때는 많이 놀아도 많이 움직여도 다음날 근육통처럼 ‘아얏!!!’ 하고 있다 보면 금방 나았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계속 아프고 계속 힘들었다. 청춘 때 누린 그 휴식을 마음껏 느끼려면 이렇게 애써서 움직여줘야 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자칫 청춘의 그들이 보기엔 더 청춘 같아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게 다 노력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싶어서. 우리 딸이 산에 가자고 할 때 ‘오브코스 와이낫. 렛츠고!’를 선선히 외치기 위해. 그래서 매일 아침 5시 나는 운동하러 일어났다. 일어나서 하루이틀 어떻게든 운동을 하다 보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그동안 절대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았던 한 책이 전자책으로 출간되어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아주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보통 작가, 특히 소설가를 생각할 때 가지는 이미지, 그러니까 이상한 고정관념 같은 게 있긴 하다. 이 고정관념에서 ‘소설가’는 어딘가 통제 불능이거나 한량이어서 영감이 올 때는 마구 일하다가 영감이 안 오는 일상에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는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특유의 루틴을 가지고 있고 그 루틴을 실천하는 방법도 유명하다.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 특별히 잘 써지는 날에도 이건 예외가 없어서 한 글자도 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글이 안 써지는 날에도 예외가 없어서 정해진 분량을 채울 때까지 글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 작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며 달리기를 시작하게 됐다는데 이 과정을 당연히 쉽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달렸다. 마치 글쓰기처럼. 글쓰기와 조금 달랐던 점은 한 걸을 더 달리는 날도 덜 달리는 날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평균은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체도 글쓰기도 단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글쓰기와 달리기는 서로의 고통을 상쇄시켜 주기도, 공감시켜주기도 하며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를 시대의 작가로 만들어 준 것의 온전히 그의 노력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노력의 팔 할은 그렇게 쓰고 노력하려는 자기 안의 의지, 그 의지를 키우는 일이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리곤 생각한다. 맞다. 달릴 때의 그 기분. 상쾌하다가도 차오르는 숨에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내딛게 되는 발걸음, 걸음. 그 한 걸음씩 옮기는 것이 마치 글쓰기와 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좋은 어른은, 좋은 가르침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몰라도 불현듯 다가올 수 있다. 시공간을 넘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는 이렇게 이불속에 눕고 싶은 나에게 말해준다. 이젠 일어나 글을 쓰고 삶을 살라고. 멋진 어른은 책 속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