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어느 겨울, 세기말을 지나 버스 최초로 드라마 <겨울연가>의 광고가 시도되고, 그다음 해에는 월드컵의 열기가 불어 닥치기 직전의 어느 겨울날, 나는 망한 수능 성적표를 앞에 두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아빠와 오빠를 제외한 엄마와 나, 둘만의 가족회의가 열렸다.
“엄마,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어차피 돈도 없는데. 그냥 난 2년제 가서 돈이나 빨리 벌래”
어려서부터 나의 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엄마였기에 나의 생각에 순순히 동의를 했다. 그리하여 찾은 전문대 박람회. 그때만 해도 각 대학교가 모여 도서전 마냥 부스를 차려놓고 홍보를 하는 그런 자리에 얼마나 사람들이 오겠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엄마와 나는 기나긴 줄 끝에서 어리둥절했다. 그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홀린 듯 브로슈어를 쓸어온 게 문제였다. 그때부터였다. 그때는 몰랐지. 내가 이 일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을 줄. 그리고 책을 사랑하게 될 줄은.
전문대박람회에서 쓸어 온 브로슈어를 하나씩 훑어보며, 엄마와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전문대의 특성상 직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특성화 학교들이 많았기에 단순히 학교와 전공을 고른다기보다는 직업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아무래도 모태아싸였던 나의 성향을 고려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은 패스, 이래서 패스, 저래서 패스를 하다 보니, 아 맞아 나는 그림을 잘 그렸었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무조건 예술계통으로!
그래서 선택한 것이 K대학 출판디자인과와 H대학 텍스타일 디자인학과였다. 이 둘을 선택한 이유도 단순했는데, 그래픽과는 각 학교마다 있었지만 출판과는 따로 없었고, 텍스타일 디자인은 그때 개봉했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본 적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학교 모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과연 어딜 선택할 것인가.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극 중 텍스타일 디자이너를 꿈꾸던 ‘지영’은 직접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텍스타일 디자인이 모두 그러한지는 지금도 알 수 없으나 한동안 손 놓은 그림을 그것도 한 땀 한 땀 그릴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한 가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출판과로 가자! 출판으로의 나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출판과에는 두 개의 세부 전공이 있었다. ‘종이책’과 ‘전자책’ 전공. 각 전공은 졸업작품으로 각자 선택한 전공의 작품을 심사받아야 했고, 전자책이 투자 비용도 적게 들고 졸업도 비교적 쉽다는 소문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전. 자. 책이라는 그 말 자체가 내 입에 착 붙지가 않았다. 그런 찜찜한 기분을 가지고 졸업을 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종이책 전공을 선택했고 그 길을 걸어왔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중고 책방 한편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 책은 <권외 편집자>(츠즈미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 컴인, 2017)이었는데, 그동안 종이책의 우수함을 널리 널리 전파하고 다니던 내게 잔잔한 쇼크를 일으킨다. 인상 깊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책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결국 좋은 정보를 최대한 많이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소 조악해 보이더라도 천에 하나, 만에 한 명은 그 정보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 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다소 조악해 보이더라도 최대한 많은 내용을 넣습니다. 그건 캡션이라도 마찬가지예요 … 게다가 전자책은 사진의 정보를 그대로 실을 수 있습니다. 인쇄라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유실되거나 생략되는 정보들을 다 담을 수 있어요’
그렇다. 전자책은 20여 년 전 내가 알던 그 전자책이 아니다. 그 뒤로 전자책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자책은 이미지의 누락 및 유실, 생략되는 정보를 막을 수 있고, 파일에 따라 확대도 가능하다. 원하는 크기나 폰트로 바꿀 수 있어 커스터마이징을 좋아하는 요즘 세대들에게 딱이고,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아이디만 있다면 이 기계 저 기계에 접속해서 볼 수 있고, 그렇기에 동시에 여려 권을 비교하며 볼 수도 있다. 하이라이트 기능과 메모 기능은 손쉽게 기록을 도와주고, 독서장을 만들어 준다. 각주 및 미주도 손쉽게 볼 수 있어 논문을 쓴다면 시간을 훨씬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친구들은 전공서적은 모두 pdf화해서 들고 다닌다 등등
물론 현대인이 참기 어려운 로딩 시간이라는 장벽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단점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장점들은 출판인이라면 지나치기 너무 어려운 매력적인 것들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세일을 하고 있고 있었다. *사에서 사운드업과 함께 *사 전자책 1년 구독권을 준다. 이렇다면 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단 경험해 보자!
이 결과는 추후에 내가 구독 서비스도 아닌 **사에서 전자책을 약 300권 이상 사게 만드는 일을 초래했다. 구독 서비스만으로는 볼 수 없는 책이 너무 많았고, 사고 싶은 책은 또 너무 많았다. 구독 서비스는 한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각 서점마다 달랐다. 전자책만 있는가. 오디오북도 있고, 앱북도 있었다. 이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세계.
태초에 종이책이 있었고, 종이책이 자식들을 낳아 이름을 붙였으니, 전자책, 오디오북, 앱북이라 불렀다. 그 자식들이 꽃을 피우기에는 그 시대가 척박하였으나, 시간이 흘러 밀레니엄 세대를 만날지니, 그 쓰임은 다양할 것이요, 기술은 점점 발전할 것이다. 출판사가 보기 좋았더라.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좋았더라. 읽는 사람도 좋았더라. 듣는 사람도 좋았더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한 종이책 러버가 전자책까지 사랑해버리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이책이 찐이지. 전자책은 그야말로 전자 데이터일 뿐. 책이 아니야라고. 맞다. 전자 데이터이지만 그 또한 책이 맞다.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종이를 꿰어 만들기 전, 두루마리를 책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전자책도 오디오책도 형태만 다를 뿐 책이다. 식상한 말로 그것들도 모두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있다. 어떻게 사람이 같은 것만 먹을 수 있겠는가. 시대에 맞춰 그날에 기분에 맞춰 장소에 맞춰 어떨 때는 종이책을 들 수도 어떨 때는 전자책을 켤 수도 어떨 때는 오디오북을 들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열린 귀 열린 눈으로 그저 모 오디오북 서비스의 광고 카피처럼 귀깔나고 끼깔나게 즐기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