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2년간 3장의 개근상, 그러니까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2년의 학창 시절의 나에겐 그 어떤 지각, 결석, 조퇴도 없었다. 과목별 우수상 말고 우등상 같은 거라던지 반장 선거에 출마한다던지 한 사건은 12년 동안 없었지만 졸업장과 함께 개근상은 항상 남았다. 근데 그건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출근… 아니 등교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엄마가 정한 원칙은 이러했다.
‘너(글쓴이)는 (엄마가 정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학생의 본분을 다 하고(공부를 잘하고 못 하는 건 엄마 소관 아님), 엄마는 엄마의 본분은 다 하자!’
그래서 우리 네 식구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한 식탁에서 엄마의 미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아침 식사를 다 같이 하고 각자의 일터 혹은 학교로 떠났다.
이건 나이가 상당히 든 후에도 이해가 안 된 것 중 하나였는데 그 시절 나는 그리 공부를 잘하거나 또는 관심 있거나 또는 또래 활동에 재미를 느끼는 아이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학교에 존재하는 수많은 머릿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빠진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내 볼 일 좀 있으면 빠지면 안 되나. 엄마는 무슨 보약을 먹었나. 어떻게 저렇게 매일 식사를 준비하지?
그러나 나의 꼼수(?)를 담은 불성실에 대한 열망은 엄마에겐 통하지 않았다. 엄마의 명언 중 하나는 “아프면 학교 가서 쓰러져라”였다.
밖은 비바람이 몰아 치고 설령 내가 쓰러질 듯 아프더라고 학생인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학교를 빼먹고 가는 가족 휴가라던지, 탐구 활동, 조퇴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친구들 중에는 눈밑에 물파스를 바르면 조퇴를 시도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시도조차 못하고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던 그런 아이였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나는 진짜 쓰러지고 말았다. 학원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것이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뛰어온 엄마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비싼 MRI도 찍었었지만 아무런 이상을 못 찾았었다.
그날 자주 볼 수 없었던 엄마의 눈물을 봤었다.
“엄마가 미안하다! 네가 이렇게 힘든지도 모르고… 학원 다 관둬!”
자식의 건강 앞에서 엄마의 원칙은 살짝 무너지는듯했다. 내가 쓰러진 게 그때 먹던 트러블 약의 부작용이란 것을 알기 전까지. 엄마는 진실을 알고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원래의 모드대로 돌아왔다.
“응, 안돼.”
요즘 유행하는 밈으로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는 특허가 있다면 엄마 것이 먼저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내게 각인된 성실 유전자는 나의 지난 시간들을 버티게 해 준 동력이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실수와 좌절이 있었지만 언제나 끝이 있었고 그 끝에는 배움이 있었다. 중간에 그만뒀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일들이었다. 그날의 눈물들은 현재의 글이 되어 책으로 출간됐다. 마침내!
책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 사이 엄마의 카톡 프로필은 내 표지 사진으로 슬며시 바꿔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에게 내가 자랑이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지쳤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서서 내게 맡겨진 일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그 신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눈물이 나도 나는 오늘 또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어제보다 오늘 더 멋지게, 날마다 멋지게 해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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