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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괜찮기만 한 사람이냐고 물으신다면

by 김경민

어벤저스도 아니지만 나에게는 초능력 아닌 초능력이 있다. 그건 바로 기억력. 그런데 이 기억력이란 게 매우 요상해서 아주 심하게 왜곡돼 있다. 마치 위기의 상황에서 거미줄이 튀어나와 버리는 스파이더맨처럼.


실제로 나는 평소 기억이 아주 안 좋은 편인데, 바로 5분 전 한 이야기도 기억 못 하고, 어제 본 사람도 모르며, 특히 사람 얼굴은 심하게 못 알아봐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면서도 러닝 타임의 절반이 지난 한 시간쯤 됐을 무렵부터 몇몇 캐릭터의 이름을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사람을 못 알아본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하게 기억을 못 함에도 어느 순간에는 마치 기억 속에 그 상황을 그대로 옮기듯 그날의 공기, 온도, 했던 말, 지나가던 사람을 모두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 말들을 기억하지?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그런 기억들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런지 항상 인생이 피곤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참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이렇게 축하받을 일인가, 이런 자격이 있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속의 내용들이 그리 아름답기만 하냐, 그 인연들이 항상 좋았나라는 물음에 쉬이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이런 인연들이 나온다.

당.당.히 퇴직금 할부 처리를 요구하는 사장님, 점심밥 차리라는 사장님, 회사에 감시망 만드는 사장님…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책에 차마 적을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드는 질문 하나. 그들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사람이었나.

그 한 예로 퇴직금 할부 사장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참 좋은 꿈이더라. 그런데 그런 말이 있어.

사람이 꿈을 꾸면 그걸 말하고 다니면 좋을 것 같지만 어떨 때가 꿈이 말로 나오면서 먼지가 돼 버린다고. 그래서 꿈은 가슴속에 꼭 품고 다니면서 소중히 아껴줘야 해”


이렇게 주옥같은 말을 따뜻하게 해 주신 분이었다.


또 3개월 만에 퇴사를 통보하고 뛰쳐나올 때 어떤 사장님은 내게 이런 말도 해줬다.


“난 네가 디자인을 잘하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어. 그걸 확인할 물리적 시간이 없었거든.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는 게, 너는 곤조가 있어. 그래서 잘할 거야. 그래서 난 원래 이런 말 잘 안 하지만 그래도 네가 회사를 그냥 다니면 좋겠어”


누군가를 어떤 말 한마디에 미워하고 싶어도, 또 이런 좋은 기억들도 많아서 온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은 참 다면적이구나. 한 사람을 만나도 언제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

내가 앞서 말한 그 사장님들은 어떤 모습의 사람이었을까. 한 순간이라도 같은 모습이 있었을까.


또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그럼 그렇게 좋기만 한 사람이었는가.

나의 대답은 ‘아니오’.


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자주 했으며, 곧잘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를 많이 보였다. 실례로 입사가 결정되어 기다려 준 회사에게 이유 불문 입사 불가를 통보하기도 했고, 나의 퇴사를 아쉬워하던 동료의 마음을 애써 무시하기도 했다.

나 또한 나쁜 사람이었고, 착한 사람이기도 했다.

인간이 다면적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고, 이제는 고치려고 한다는 것,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그런 시기에 만난 인연의 탓일 뿐 다른 시기에 만났다면 다른 인연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러니 누구라도 깊게 미워하지 말고 내가 받을 것이 있어 돌려주고 싶은데 그 인연에게 바로 돌려줄 수 없다면 다른 이에게 전달하듯이 돌려주면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이어달리기처럼.


앞으로의 인생은 그야말로 차. 카. 게 살고 싶다. 여전히 나의 왼쪽 뺨을 때린 사람이 생긴다면 오른쪽 뺨을 내밀진 못하겠지만, 독하게 미워하지 않고 적당히 미워하고 적당히 이해해가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지만 귀찮은 일에 귀찮아하지 않고 나설 수 있는 그 정도의 사람은 되기. 그래서 괜찮기만 하진 않지만 괜찮기도 한 사람 되기. 그것이 앞으로의 나의 삶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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