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에는 늘 눈이 왔다. 정확히 말하면 1980년대의 11월 즈음엔 언제나 눈이 내렸고, 그래서 가족들은 내 생일 즈음이 되면 겨울이 온다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곤 했다. 그 시절이 남아 있는 몇 장의 사진들엔 생일의 기쁨을 한가득 안고 흩날리는 눈밭 위에서 새빨간 코트를 입고 뛰노는 내가 있다.
하지만 지구의 온난화 때문인지 어느덧 내 생일에도 눈이 내리지 않게 되었다. “언제 태어났어요?”라는 질문에 ‘겨울’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던 시기는 희미해졌고 이제는 ‘가을’이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시간은 세월은, 눈도 녹이고 계절도 녹이고 내가 태어난 겨울도 녹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가을에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겨울에 태어난 채로 있었던 나는 마음속에 녹아 없어져버린 겨울의 한 조각을 가지고 살았다. 아무리 댑혀도 댑혀지지 않는 차가운 마음. 그 마음은 마음을 얼어붙게 하더니 듣는 귀도 말하는 입도 차갑게 얼어 붙이게 만들었다.
얼어붙은 귀는 그 본연의 임무인 ‘듣기’의 기능을 상실하게 했다. 말을 곡해해서 듣고 진심이 아닌 어떤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기도 했다. 이제는 다 녹았다고 생각했는데 구석에 자리 잡아 보이지 않던 마음의 얼음 한 조각이 차갑게 내 마음을 찔렀다. 그걸 깨닫게 된 건 아빠의 한 마디였다.
언제나 진심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 자기 마음의 상처를 감추려 또 다른 상처를 내는 사람. 그게 바로 아빠였다. 그날도 아빠와 사소한 말다툼이 시작됐다. 흐르는 눈물이 내 얼어서 아픈 마음을 녹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아빠는 또 소리 내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이 안쓰러워서.
나와 같이 ‘겨울’에 태어난 아빠는 언제나 마음이 얼음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차가웠다. 이제는 내 생일엔 눈이 오지 않지만 지금도 아빠의 생일에는 눈이 내린다. 아빠의 마음속에 있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그것을 싸고 있는 차갑고 또 차가운 얼음 때문일까.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이제는 무엇이 무엇인지 뒤섞여버려 알 수 없는 마음.
지구가 또 댑혀지고 댑혀져서 아빠의 생일에도 눈이 내리지 않게 된다면 그때 아빠는 ‘따뜻한 봄에 태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비록 ‘겨울’에 태어났지만 ‘가을’에 태어난 사람이 된 나처럼. 지구의 온난화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아빠의 생일에도, 계절에도 따뜻하다보다 못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기를. 그래서 부디 그 안에 있는 따뜻한 마음이 자유를 찾아 흘러내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