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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Sep 21. 2022

기 센 사람이 언니지. 암 그렇고 말고

6살, 한 살 어린 데도 나한테 야!라고 부른 '인자'

결혼을 하고 운 좋게 한 집에서 오래 살게 되었지만 곧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겨우겨우 이사할 곳을 찾았지만 사실상 경기도나 다름없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전혀 없었기에 내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러나 새로운 생활은 여러모로 만만치 않았다. 일단 약 두 시간, 고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퇴근 시간까지 생각하면 고되기가 보통일이 아니었다. 스무 살 무렵에도 이 정도 거리를 다니며 학교를 다녔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가 따불. 마흔 살이다. 체력이 받쳐 주질 않았다. 출근해서 앉아 있는데 머리가 뺑뺑 돌고 현기증이 났다. 나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하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집에 돌아가서도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가 됐다. 문제는 집에 나만 사는 것이 아니니 표정 관리가 필수였는데, 그것에 계속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자꾸만 누워있고 싶고 자고 싶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불편함을 호소했다. 아이는 힘들었는지 우리 집 아니라며 매일밤 울기 시작했다. 괜히 이사를 온 것은 아닌가. 배부른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꼭 잡고 싶었을 좋은 기회를 우리 가족이 얻은 것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 생활에 정 붙이고 살아야만 했지만, 알고 있어도 여전히 쉬워지진 않았다.

모 드라마에서 말한 서울과 수도권에서의 삶을 계란 노른자와 흰자에 비유한 것은 완벽한 비유였다. 물가, 생활 반경, 교통수단 등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모든 것이 시간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집 앞에는 버스가 딱 한 대 있는데, 배차 시간이 매우 길었으므로 대안으로 따릉이(서울형 대여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그동안은 실외 마스크가 의무 착용이 해제되고도 습관이 되지 않아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었다. 이는 자전거를 타면서도 계속되었는데 마침 그 사실이 생각나서 자전거를 세우고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고 달리는 순간 코끝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풀냄새가 가득한 바람이었다. 코끝의 감각이 열리니 귓가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풀냄새 가득한 바람과 소리가 내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약 두 시간의 고된 퇴근길이 사르르 녹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이 또 떠올랐다. 여섯 살 때의 내가 소환된 것이었다.


여섯 살의 나는 장기 지방 출장이 잦았던 아빠와 같이 산 기억보다 떨어져 산 기억이 더 많았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엄마, 아빠, 오빠, 나 이렇게 네 가족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게 된다. 아빠가 지방 출장지마다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태어나서 늘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여섯 살부터 2년 간 경북의 어느 마을에 살게 된다.


그 시절은 서울도 개발이 덜 되었는데 지방의 동네는 어련했을까. 동네 곳곳에 공터와 풀밭이 아주 많은 게 지금의 집과 닮은 게 많다. 여섯 살의 나는 유치원에도 가지 않았기에 늘 몇 안 되는 동네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매일 아침 일어나 오전 내내 그림을 그린다가 점심을 먹고 밖으로 튀어나간다. 그러면 언제나 동네 친구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과 함께 몰려다니다 당시 내 키보다도 더 높이 자란 풀밭에 누워 풀냄새를 맡으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술래잡기도 하고 흙장난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다 어둑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제대로 된 놀이터가 없기도 했지만 우리만의 놀이터가 사방에 널려있었으니 사실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네에 아이들이 몇 안되었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친구가 되었는데, 나름 여섯 살이었던 나는 언니 부심도 있었다. 그래서 아랫집에 사는 한 살 어린 ‘인자’가 나에게 반말을 하는 게 내심 못마땅했다. “나는 여섯 살! 언. 니. 야!”라고 해도 “흥”이란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 인자에게 ‘언니’라고 더 당당히 요구할 수 없었던 건 인자가 나보다도 더 당찬 꼬마였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당시 3층 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인자네 집은 2층, 주인집은 1층에 살았다. 그간 서울에서 나름 곱게 자란 쫄보였던 나는 잠자리 한 마리도 못 잡고 겁이 많아 작은 물체에도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그런데 1층에는 아주 키가 크고 사나운 흰색 진돗개(로 추정되는)가 있었다. 밖에는 빨빨거리고 잘 돌아다녔어도 집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뒤에 숨어서 들어가거나 늦게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린 적도 있다. 개는 영리해서 자기보다 서열이 아래인 게 분명해 보이는 나에게는 더더욱 짖어댔고 나는 더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는 바로 인자! “저리 가!” 단 한 마디로 1층 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나보다 키도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아우라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인자를 속으로 리스펙하기로 하고, 나를 언니라 부르지 않아도 인정하기로 했다(물론 말로 공식화하진 않았다).


이제는 한두 살 적은 사람이 말 놓는다 해서 기분 나쁜 나이도 아니고, 나이를 따지기는 너무 민망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쫄보여서 벌레 한 마리에 아이와 함께 놀라고 도망간다. 앞으로도 그런 담력(?)을 가질 자신은 없지만 어릴 적 커다란 개 앞에서 당당했던 인자처럼, 인생 쫄지 않고 살고 싶다. 다섯 살의 인자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인자 사부님, 어디 계시나요?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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