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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Sep 26. 2022

날카로웠던 첫 왕따의 기억

10살, ‘앞장 서 왕따를 했던 친구’가 ‘기능적 친구’가 되기까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단어도 같이 태어난다. 그동안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단어를 부여받으면서 개념이라는 것도 같이 생기고, 그 개념이 사회에서 공유되기도 한다.

내가 어릴 때도 이런 경향은 있어서 지금 들으면 아주 유치한 단어들이 많이 생성됐다. 여럿 있었지만 한창 유행했던 만화에서 온 ‘짱’이 그랬고, ‘왕따’가 그랬다. 사람이 둘셋 이상 모이면 서로의 우수함을 뽐내고 싶은 인간이란 동물의 본성이 그대로 투영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딱히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언어가 되어 사회라는 수면 위로 올라온 것뿐이지 늘 우리 주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땐 이렇게 왕따를 당한다 해도 반에 이미 다른 아이들도 많았기 때문에(한 반에 50여 명씩 10반이 넘었으므로), “어? 나랑 놀기 싫어? 그럼 난 딴 애랑 놀래~”라던지 이번 기회에 난 아싸의 길을 가련다~ 하는 친구도 있었고 왕따들이 모여 새로운 그룹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거부의 의사를 받는다는 것은 처음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10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어려서 어린애 치고도 다중이 같은 성격을 지녔었다. 한 마디로 좋게 말하면 마이 페이스, 나쁘게 말하면 자기밖에 몰랐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었다. 그날도 새로운 친구 J가 전학을 왔다. 담임 선생님은 이 친구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 같이 하교하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는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절친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가 처음엔 좋았을지 몰라도 성향이 달랐다면 같이 어렸던 J가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새 엄마들끼리도 절친이 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이 바뀌어져 버렸다. 그 이유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오직 기억나는 건 깨발랄했던 나와 달리 친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친구였다는 것이다.


J는 어느 순간부터 다른 친구 B의 뒤에 숨어서 나를 쳐다봤는데, 그럴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B는 나에게 알 수 없는 괴롭힘을 시작했다.

그 괴롭힘도 열 살답게 참으로 원색적이었는데 대부분 이런 내용들이었다.


더럽다 = 응? 안 더러운데?, 안 예쁘다 = 응? 이것도 아닌데?, 제멋대로다 = 그건 맞지만 너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무식하다 = 공부를 못할 뿐 무식까진 아니었어, 잘 운다 = 이건 맞지 등등


볼썽사나울 수는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큰 비난을 받을 일인가 싶은 일들이 많았지만 그 나이의 나에게는 꽤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그 시절 나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처음 본 친구가 나에게 잘해줬다. 어? 왜 나한테 잘해주지… 내가 뭘 한 거지?”

라고


깨발랄했던 열 살의 나에게 사춘기와 함께 왕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소극적인 아이가 되어갔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도 소심해진 나는 쉽사리 친구를 사귈 수 없어서 주로 혼자 앉아 있었다. 인연은 얄궂게도 같은 반에 B가 있었다. 사실 B가 같은 반이라는 것에 긴장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친구를 만드는 게 어렵고 만들어도 자꾸만 무리에서 떨어지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 어느샌가 친구를 만드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B였다.


그렇게 한 학기를 B와 함께 점심도 먹고 화장실도 같이 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예전 일을 밖으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속내를 드러내서 이야기를 한 적은 더더욱이 없었다. 그냥 필요에 의해 옆에 있었고 B도 곁을 내주었다. 외롭고 적응도 안 되는 중학교 1학년의 시간을 B와 함께 했다. 그렇게 기능으로서만 함께 한 친구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B 뿐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냈었다. B가 나를 보는 눈빛에서 지난날을 미안해하는 것을 충분히 느꼈다. 단지 서로 차마 말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따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B는 그 시절의 괴롭힘을 시간이 지나서 돌고 돌아온 인연에서 도움의 손길로 나를 도와줬다.


나는 그 이후로도 많은 친구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는데, 그 과정에선 때론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B를 생각했다. 사람의 인연이 한 번 나빴다고 계속 나쁘리라는 것도 없고, 잘못한 행동이 있는데 갚을 수 있을 때가 있을 때 갚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나도 실수한 게 있다면,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언제가 깨닫는다면 그것을 바로 잡지는 못할지언정 갚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꼭 갚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언제나 실수를 반복하고 때론 사람에까지 실수하는 ‘나’이지만 언제든 정정할 수 있는  내면에 힘이 있는 사람이 되길. 나는 그 시절 B에게서 배웠던 것 같다. 고맙다. 친구야.



   

친구에게 못다 한 말: 친구야, 내가 좀 별나고 그랬어도 더럽고 안 예쁘고 무식… 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열 살이 유식해봤자 얼마나 유식했겠니. 참… 그때는 듣고 너무 충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완전 타격 제로의 말들이었던 것 있지. 만약 우리 딸에게도 이런 격동의 사춘기가 온다면 꼭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또 들더라. 누군가 너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잘 들어보라고.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원색적인 비난일 수도 있다고. 원색적인 비난은 그냥 무시하던지 그대로 받아쳐 버리고, 사실이라면 너의 발전적인 방향을 위해 조언해 준 거라고 생각하고 정진하라고. 어쩌면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차마 못할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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