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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상상하기] 못하는 사람

by 김경민

당신은 지금 열두 살이고 미래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일기의 주제는 ‘내가 스무 살이 되어 해외여행을 간다면’입니다. 지금부터 쓰기 시작!



정말 짜릿한 상상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열두 살인 데다가, 스무 살을 상상하며, 해외여행 계획을 세운다니. 여행 계획 세우는 건 지금부터 시작! 해도 하루에 20개는 족히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숙제라니. 요즘 말로 이런 꿀 같은 상상이... 상상하면 할수록 짜릿하다!!!

엇.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서. 지금 나는 스무 살이 아니다. 열두 살도 아니다. 해외여행도 못 간다. 그리고 이건 일기도, 숙제도 아니다.

이건 열두 살 큰 조카의 여러 가지 숙제 중 하나인 ‘상상일기-내가 스무 살이 되어 해외여행을 간다면’이다.


조카에게 ‘스무 살’은 아득하고 또 아득한 ‘미래’이지만, 나에게 ‘스무 살’은 다른 의미에서 아득하고 아득해서 저 멀리 지나가버린 ‘과거’다. 여행을 안 가도 좋으니 스무 살이 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도 과거를 떠올리는 것도 어려워 일단 그 시절의 일기장을 펴보기로 한다. 다행히 그때는 일기를 쓰던 때라 많지는 않지만 그 무렵의 내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다.


...

얼마 읽지 않았지만 다시 덮게 되는 일기다. ‘스무 살의 나’는 미래를 비관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노력의 무한함을 불신했다. 그래서 제대로 노력도 안 했으면서도 이것저것 탓을 했다. 못나고 못난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 모습 자체도 많이 잊고 있었지만, 일기장 속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볼펜 자국처럼 그 필체를 보는 순간 선명하게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마흔 살의 나’는 ‘스무 살의 내’가 상상했던 그 무엇도 되지 않았다.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도 상상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그렇기에 앞으로의 이십 년을 또 어떻게 상상해야 될지는 참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그 시절과 다른 게 딱 한 가지 있다면 미래를 무조건 비관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 스무 살에 스스로 저주를 걸듯 살아온 나임에도 마음속 깊은 곳부터 나를 아껴준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또 결국은 나 자신을 사랑했기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사람 같은 모습은 하고 있게 됐다.


어디에선가 본 것인데 현재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호화로운 것은 이미 그렇게 상상했기 때문이란다.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들려는 많은 사람의 노력. 그것이 빛을 발해 현재를 만들었고 미래를 만들고 었다는 것이다.

뒤돌아 보는 건 여전히 아쉽고 미래를 내다보는 건 아득하다. 차마 꿈꾸지 못하겠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그 두려움을 깨고 꿈을 꿔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꿈꾸고 그리고 실현하기. 여전히 이십 년 뒤는 상상 못 하겠지만, 바로 내일, 일주일 뒤 그리고 일 년 뒤라도 조금씩 상상하고 계획해 실천해 나가기. 늦었지만 마흔 살의 꼬마인 나는 늦은 다짐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조카처럼 상상일기를 써볼까. '미래의 나'는 '마흔 살의 나'를 그리워할까. 아쉬워할까. 보고 싶을까.


조카는 스무 살에 친구와 단둘이 상하이에 가서 동방명주를 보고 꿔바로우를 먹는 상상을 했다. 이십 년 후의 나는 일단 딸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서 ‘안 싸우면서’ 여행하고 호텔에 돌아와 맥주 한 캔씩 땄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걸 책으로 펴내면 좋겠다. 그런데... 과연... 우리 딸이 같이 가줄까?




*잘한 일:

책을 읽은 것.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될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자리에서 ‘멍’만 때리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책을 들었던 일. 책을 들고 또 들고 치열하게 읽었던 일. 책으로나마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을 들은 일. 결과적으로는 귀와 마음이 열리는 좋은 일이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렇기에 앞으로도 치열하게 내 눈앞의 일을 해 치우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내 한계를 부숴 나가는 것. 중요하다. 잊지 말고, 넘어져 주저 않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일.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할 수밖에 없었던 책 읽기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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