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청소년 시절 다니던 김밥 가게에는 젊은 사장님이 계셨다. 그리고 서른 살 즈음되어 다시 찾아갔을 때, 사장님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계셨다. 그리고 나를 알아보셨다. 남친과 같이 왔다 하니 더 놀라시며 반가워하셨다. 남친은 이제 남편이 됐고 시간은 또 흘렀고 그 김밥집은 아직 있다. 아마 사장님도 그 자리에 계실 것이다. 한 자리에서 그리 오래 일하게 될지 그분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오늘의 하루’가 쌓이고 쌓여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마치 퇴적층처럼.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가치 있게 보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김밥을 마는 것은 인류에 이롭다. 그건 확실하다
83
‘양육은 필수이고, 그 외에 것 중 못해주는 게 있으면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야지’를 나의 교육관으로 정했다
돌이켜보면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당연했지만 그 과정에서 ‘해주고 싶지만 차마 못해주는 것’에 못내 미안해서 괜한 화풀이를 하는 어른들을 많이 봤다.
그냥 나는 솔직하게 ‘비록 못해주지만 네가 커서 스스로 이루길 바란다’라고 말하고 화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일단 써두기로 한다
84
나와 비슷한 나이의 일타 강사의 명언들을 가끔 일부러 찾아본다. 그들이 사교육 시장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다. 어딜 가나 좋은 스승도 있고 나쁜 선생도 있기에. 다만 나의 스승들도 저런 멋진 말을 했을 텐데, 내가 그때 알아듣지 못했음에 미안하고 다시 들을 수 없음에 아쉬워 내 또래 친구 같은 선생님들의 말을 찾아 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85
절대 안 되는 것을 꿈꾸면 모두가 피곤해진다. 예를 들면 ‘친구 같은 딸’이나 ‘딸 같은 며느리’, ‘딸 같은 아들’ 등등. 나는 그런 무언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한 표현에 강한 반감을 가졌었다.
그런데 정작 아이가 “엄마는 내 친구야”라고 말해줬을 때 뭔가 쿵하고 가슴속에서 뭉클해짐을 느꼈다.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아닌 척하면서 나도 그런 대리 희망 같은 것의 끝자락을 아주 살포시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고마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더 욕심내지 말고 고마운 마음만 접수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딸은 딸, 엄마는 엄마
86
구독경제의 노예였는데, 안 쓰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안 쓰게 된다. 그냥 간단한 거였다. 지우면 되는 것
87
시련 앞에서 나는 결정해야 한다. 내 인생의 극복 스토리를 써갈지. 이 앞에서 주저앉을지
88
아이와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다. 거의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세계관의 충돌’ 정도는 되겠다. 그러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비슷한 거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말자. 그냥 각자의 세계관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자. 일단 아이는 어려서 안될 테니. 나부터라도
89
참 입바른 소리다 싶었던 게 사실은 나름 진심 어린 충고였을지도 모르고, 사실 입바른 소리였어도 받아들이는 내가 좋은 약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좋은 충고가 된다는 것을. 뭐든 고깝게 듣지 말자는 스스로에게 하는 충고 혹은 다짐
90
00 같은 게! 라던지, XX도 아닌 게! 등등의 표현은 자기 결함의 거울 같은 말이다. 항상 자신에게 가장 부족해서 찔리는 것을 남에게 투사한다. 마치 나는 아닌 양
91
아이는 내 ‘말’은 대부분 못 알아듣는다. 하지만 말속의 내 ‘감정’은 잘 알아듣는다. 그러니 구구절절 말하지 말되 못 알아듣게 말하지 말고, 최대한 성심 성의껏 말하자. 아이가 내 감정을 듣고 있으니
92
다른 사람의 ‘취향’을 거의 이해를 못 하는데, 그게 만약 ‘커피’였다면 하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난 뜨아보다 아아가 좋아’ ‘라떼에 샷 반잔 추가’ ‘아메리카노에 바닐라 시럽 두 번 뿌리기’ 등등. 조금의 설정만 달라져도 그건 못 마시는 게 되는 거다. 취향은 그런 거다
93
최선을 다해서 망치기
94
돌려서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돌려서 듣기도 힘들다. 서로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자
95
나도 깨끗하고 고운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어쩌면 권력이라는 것의 한 가지 표식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런 작은 표식도 나는 없다
96
나조차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내 마음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떨어져 나간 감정의 한 조각을 내 아비가 발견하고 가져갔다. 아비는 집으로 돌아가 그것을 펴서 찬찬히 보고 혼자 울었다고 한다. 나도 미처 알지 못했지만 혹은 알게 될까 두려워 외면했던 감정의 한 조각을 아비는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해석까지 마쳐버린 것이다. 나를 가장 모를 것 같았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나 대신 눈물을 흘렸다. 그건 아마 사랑이겠지
97
‘쌀이 없으니 그냥 빌렸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리고 아주 훌륭한 멘털이라고 칭송한다. 흔하지 않은 예이니까 칭송하겠지 싶다가도 화가 치민다. 예술을 하든 뭘 하든 쌀이 없으면 큰일 난 거다. 전기가 끊기면 큰일 난 거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실제로 죽은 사람도 있다. 그 상황에서 ‘타인에게 손 벌리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
빌리는 것도 한두 번이다. 백번은 못 빌린다. 왜 빌리지 않았냐는 말에는 이미 아흔아홉 번 빌려서 더 빌릴 데가 없다.라는 말도 될 수 있다.
사회가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모두를 먹일 수도 없다. 그래도 사회적 안전망, 말 그래도 떨어지기 직전에 살릴 수 있다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놔야 한다. 사회라면 그래야 한다. 그래서 가끔 방송에 나오는 ‘없으면 빌려, 주변 사람이든, 대출이든, 대부업이든’이라 말하는 건 너무 책임감 없고 때론 너무 불손하게 느껴진다
98
‘일하기 정말 싫어’라는 마음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그럼 정말 안 할 거야?’라고 묻는다면… ‘아니 또 그게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넌 왜 이렇게 극단적이니?’라고 말할 것 같다.
99
오늘도 일하기 겁나 싫네… 이러고 있었는데 후배가 물어보는 말에 또 신나게 얘기하고 알려 주었다. ‘뭐야 나 일 좋아하잖아’라는 것 다시 ‘또’ 느꼈다
100
삶도 일도 대부분의 시간은 하기 싫고 슬프고 답답한 채로 진행되다가 어느 한순간 기쁨의 순간이 광속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일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그 순간의 재미 또는 소명 때론 숙명을 위해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