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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Jan 19. 2023

37~81

37

‘어릴 땐 잘 모르니까 여행 같은 건 굳이 같이 안 가도 돼~’라고 주변에서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익히지만 금방 까먹기도 한다.

그런데 기억은 잊어버리더라도 감정은 민들레 씨앗처럼 어딘가에 남아 또 마음속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아이의 성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안 할 일은 마땅히 안 해야 하고, 할 일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것도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라 지금 보여주고 싶다. 지금의 행복을 알려주고 싶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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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주인공이 헤드폰을 끼며 출근을 하는 것을 보고 이해는 하면서도 백 퍼센트 공감은 못했는데 직접 해보니 알겠다. 주변의 소리(소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은)를 의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오는 평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소리에, 정보에 나는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그것에 몸에 주는 긴장감과 피로감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알았으므로 나 자신을 더 편안히 하는 법 하나를 습득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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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기본은 ‘잘 되면 내 덕 안 되면 니 탓’인데, 이럴 때마다 나름대로 방어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살려니 어쩔 수 없겠지 싶지만 ‘나는 정말 그러지 말아야지’하면서 똑같이 반복하지 않는 삶은 살 수 있기를. 아직까지는 성공적이지만. 사람이란 게 바뀌는 건 한 순간이라서 나 자신이라도 경계를 놓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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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할 때 단어 선택이란 게 참 중요하다고 느끼는 게, 어떤 단어를 어떻게 매칭시키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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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은 절대적이지 않다고 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 나의 기준에서는 적어도 ‘남에게 권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그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남에게 권할 수 없는 것을 그저 보편화돼서 익숙해졌다고 보통의 어휘로 희석시키고 싶지 않다.  예를 들면 ‘~~에서 자유롭다’ 등과 같은 어휘로. 자유롭고 오픈된 게 진짜 자유고 오픈된 상태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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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던진 블록에 복숭아뼈를 맞았다. 진짜 아팠다. 뼈를 때리는 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일지 모르나 진짜 작정하고 세게 때리는 것보다 더 아프다. 그래서 말로 뼈를 때린다는 것은 역으로 진짜 제대로 작정하고 (말로) 후두려 패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람이 직접 때리는 것처럼 바로 아프진 않아도 속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멍처럼 피부 속 깊은 곳부터 아픔이 올라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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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아이와 놀아주는 건 힘들지 않은 편이었다. 이제는 의사소통도 어느 정도 되는 데다 세대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아이가 하는 것이 뭐든 나도 새롭고 신기해서 아이와 함께 감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이와 놀 때는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어 마흔 살과 네 살의 놀이가 아닌 네 살과 네 살이었던 내가 앉아 놀곤 한다. 아이가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불러 놀아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고맙다. 기억 속 저 끝 지난 시절부터 다시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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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했으니까 한 번쯤은 놀러 가도 돼’와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더 정진해야지’ 이 두 가지 마음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다. ‘이만하면 됐어’와 ‘이 정도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난 해도 돼’라는 마음도 같이 끼어들어 총 4파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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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에 맞춰 아이를 키우고 대하는 공통의 정서 비슷한 게 암안리에 있었다. 내가 자라던 시기에는 이전 세대보다 말도 못 하게 풍족하고 자유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를 여전히 막 대하기도 했다. 그 막 대함의 정서의 증거 중 하나는 화풀이였다. 자기 자식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이 아이들에게 화를 냈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이는 친근한 것과는 어느 하나 같지 않았으나, 어른들은 자신들의 화풀이를 친근함으로 당당히 포장했다. 자신의 잘못을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게 된 순간이 온다면 사과해야 된다. ‘이제 와서 하기 뭐해서’라는 말에 쉽게 숨는 사람을 과연 어른이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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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기’나 ‘잠자는 것’은 공간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삶이란 게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어른이 된 이상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그런 걸 ‘어리광’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난 다르게 부르고 싶다. ‘어른광’. 미숙한 나란 사람이 받아줄 수 있는 건 ‘어리광’까지. ‘어른광’까지 오면 곤란하다. 내가 먼저 광인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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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 긋는 걸 엄청 좋아하고, 또 그 선을 침범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가 그 선을 넘는다. 애초에 내가 임의로 그은 선이므로 그들이 존재 자체를 알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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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위로에 가까운) 정신 승리’와 ‘다르게 보기’는 정말 한 끗 차이인데, 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의 두 개로 평가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정신승리든 다르게 보기 든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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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면 됐어’라는 말은 때론 최악의 말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까지라도 해 본 적은 있는지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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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정말 좋아해서 자주 마신다. 그래도 천 원짜리 커피에는 맛에든 양에든 뭐든 관대해진다. 천 원이니까. 그런데 5천 원이 넘어가면 아~하고 다시 주머니로 돈이 쏙 들어간 적도 많다. 두 번 마실 걸 한 번으로 줄이기도 한다.

그런데 책을 살 때는 나도 모르게 정말 싸다~ 하면서 마구 산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다가 지갑이 바닥나서 내역을 확인하면 다 나름 납득이 가는 내역이라 어쩔 수 없군~ 하고 넘어간다. 나름 낭비를 안 하는 삶인데도 지갑은 금방 바닥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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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어쩔 수없이 지갑이 열린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바로미터는 없다. 이건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끔 누군가에게 돈 쓸 때 주저함이 생기면 내가 저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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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만날 시간이 정말 없다. 예전에 엄마가 친구를 안 만나는 게 정말 이상했는데 이젠 알겠다. 안 만난 게 아니라 못 만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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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말했다. “힘들어서 못 해”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힘들지만 재밌어!” 심지어 ‘재밌어’에 힘주어 말한다. 말 한마디에도 성장이 느껴진다. 


54

굉장히 재밌는 글임에도 ‘이제야’ 소개되는 책이라면, 확실히 책의 겉표지가 중요하다.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땐 독자로선 표지 외엔 판단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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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다해 망각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항상 실패로 끝난다. 망각하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럴 땐 안간힘을 더해 손을 놓아야 한다. 그래야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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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삶이라도 어떨 때는 당장 내 손에 넣고 싶은 훌륭한 삶 같이 보이고, 어떨 때는 줘도 안 가질 만큼 쓰레기처럼 보인다. 삶은 그냥 거기 있었던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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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금을 줘도 안 바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가능한가?’했지만 이제는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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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매해 쓰던 독서 기록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내 인생의 베스트 책을 꼽기로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신중에 신중을 더해 뽑게 되었다. 마치 그것들이 나의 한 요소인 듯. 제목들을 이어서 읽어보니 누구보다도 나를 표현하기 좋은 말들이 되었다. ‘이상한 정상 가족’들 속에서 ‘어린이라는 세계’를 꿈꾸고 ‘계속 쓰기’를 하고 싶은 ‘권외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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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나는 이유’는 내 안에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까지 꽤나 어려웠다. 화가 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아니라 각자 사람 수만큼 있다. 그러니까 내 안의 ‘괜히 찔림’ 버튼이 눌러진 것일 뿐 말은 그냥 말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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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이고, 몇 가지 물건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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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의 장래희망은 건강한 사람, 폐 끼치지 않는 사람, 제 몫을 다하는 사람.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괜찮은 사람. 그래도 공중도덕은 반드시 지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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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잘못됐잖아. 그래서 대답을 할 수 없어.라는 말은 영화 속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속에서 내뱉어져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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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갔냐고’가 아닌 ‘왜 못 돌아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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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이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말할 거야!’라는 못된 말을 해야 알아먹는 인간이 있다. 상대방은 최대한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을 모두 지켜보는 사람은 알고 있는데 듣는 사람만 그걸 모른다


63

마음을 끙끙 앓게 되면 신체도 덩달아 같이 앓게 된다. 마치 파도가 저 멀리서 서서히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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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내가 쓰는 말은 서울말도 대구말도 아닌 그 언저리에 있는 무엇이다. 그건 순간적으로 떠올리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쪽 단어도 아니고 저쪽 단어도 아니며, 이쪽 억양도 아니고 저쪽 억양도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나를 설명해 주는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도저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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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에 물을 주듯, 지친 창작열에 칭찬의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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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화가 나도 말 한마디면, 일단정지! 마음의 급한 불은 어느 정도 끌 수 있다. “저 00가!”


67 

육아일기를 쓰다 보니 이건 일기가 아닌 느낌도 든다. 마치 관찰기에 더 가까운. <쑥쑥이 관찰기>. 무언가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게 내 인생에 있었던가. 이 또한 아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고맙다. 엄마 키워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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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라도’ 돼도 그게 누구에게나 무례해도 된다는 자격증 같은 게 부여되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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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알람이 일깨워준다. 글을 써라! 휴먼! 너의 가치를 글로써 증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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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한 000도 싫지만 나이스하지도 않은 000은 더 싫어(그런 사람은 되지 말자)


71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한번 느낀다. ‘~하지 마라’, ‘~해라’는 말은 절대 안 들을 거란 거. 그 두 가지 말만 아이에게 안 해도 아이는 알아서 잘 클 것 같다. 적어도 나처럼은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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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표지로 판단하지 마라’는 격언은 잘못됐다. 책표지도 일부분이니 책 표지도 판단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73

꾸준한 성공은 진짜 어렵다. “이것 봐! 이 사람은 회사 안에서 이렇게까지 해서 성공했어!”라는 나의 말이 무색하게 그 사람은 자기가 말한 원칙(회사 안에서 일하기)을 깨서 망했다. 그러게 회사는 왜 나왔어.


74

장래희망은 훌륭한 꼰대


75

책은 바로 사서 읽어도 재밌고 뒀다가 10년 뒤에 봐도 재밌다. 그런데 지금 재미없다고 앞으로도 계속 재미없는 건 아니고 또 지금 재밌다고 다음에도 재밌다는 법은 없다. 결국 책을 읽을 때의 나의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 이런 변덕 끓는 내가 싫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또한 책이 나에게 알려준 일 중에 하나다


76

‘지금의 행복’이 ‘불행의 서막’ 일지, ‘행복의 피날레’ 일지, ‘행복 또는 불행의 오프닝’ 일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어떻게 굴러갈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그 상황에서 너무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는다면(또는 있는 힘껏 좌절한다면) 끝끝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어떤 믿음 같은 게 살다 보니 생겼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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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너무 책만 읽어! 쉬운 것만 하려고 해!”라는 말을 듣고 분했지만 맞는 말이어서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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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몇 년 전 꿈에서 본 미지의 장소가 자꾸 생각날 때가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진 않지만 어딘가 가본 것 같고 그래서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존재하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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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理想)이 가득한 ‘원더랜드’나 ‘네버랜드’ 같은 현실은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고 실상은 매우 이상한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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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 따라선 나의 이상(理想)이 남에게는 곧 허구이고 거짓말이고 또 망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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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게 얼마나 허구인지, 또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게 또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쯤 ‘글로써 너를 표현해라’라는 푸시가 올 때 이것이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글로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자꾸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는 나에게 하는 달콤한 사기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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