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나의 세 마리 고양이 가족

_ 내 사랑 곰산송이

by 행복한 거복이

34살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준 소중한 이름을 개명하기로 결심했다. 34년 동안 불려졌던 내 이름을 버리고 '두배로 성하다'라는 뜻을 가진 새 이름이 생겼다. 두 딸이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 근처에 있는 철학관에서 이름을 지었었는데 개명을 결심하고 철학관에 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3가지의 이름 후보 중에서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도록 나를 응원해 주는 느낌이 드는 이름을 선택했다. 가족들(사실 연락할 가족도 없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개명신청서를 제출하고 이사를 갔다. 이렇게 나는 나의 인생을 새롭게 리셋했다.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가족은 4명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가족을 완성하는데 6년이 걸렸다. 이혼한 여자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정말 쉽지가 않았다. 두 딸을 내가 키우지 않는다고 하면 어느 순간 내가 유책배우자가 되어 있었다. 일일이 해명을 하는 것도 힘들어서 어느 순간 말을 하지 않았더니 '골드미스'로 봐주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골드도... 미스도 아닌데 말이다. 혼자 자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고양이 분양 밴드를 가입을 했고 거기에서 잘생긴 나의 첫째 아들 곰이를 만났다.


곰이는 아메리카숏헤어와 코리아숏헤어가 섞힌듯했고 경남 김해에서 2번째로 파양이 결정이 된 상태였다. 아메리카숏헤어의 피가 섞인 탓에 덩치가 컸고 1살이라고 했지만 2~3살 정도 되어 보였다. 차가 없었기에 렌트를 하고 고양이 케이지를 급하게 구입해서 우리 집으로 곰이를 데리고 왔다. 혼자자기 싫고 외로워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우리 곰이의 에메랄드색의 눈이 나를 사로잡았다. 곰이가 집에 온 일주일 동안은 밥그릇에 있는 사료는 사라졌지만, 고양이를 볼 수는 없었다. 소심한 성격의 곰이는 낯선 우리집 침대밑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곰이가 드디어 내 품에 안겼고, 그 뒤로는 한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는 엄마껌딱지 고양이가 되어주었다.




논술수업에 소질이 있었던 나는 계속 수업이 늘어났고, 퇴근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외로워서 곰이를 집에 데리고 왔는데 곰이혼자 집에 있어야 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밥만주고 맨날 집 나와서 밤늦게 들어가서 미안해"라는 노래가사처럼 곰이에게 점점 미안해졌다. 그런 곰이가 심심하지 않도록 다시 고양이분양밴드에 접속을 했고, 양산지하철역에 노란 가방에 담긴 채 버려진 우리 산이를 만났다. 산이는 전형적인 코리아 숏헤어 고양이로 이쁜 외모와는 다르게 까칠한 매력이 있었다. 양산지하철에서 데리고 와서 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케이지속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던 우리 산이의 하얀 발과 핑크색코를 보니 둘째 아들로 합격이다. 산이가 우리 집에 온 첫째 날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뻔뻔하게 곰이의 밥과 물을 와구와구 먹더니 갑자기 하악질을 했다. 우리가 너를 나쁘게 대하지 않을 거라고 무심하게 굴었더니 2~3일쯤 지났을 때 목이 아픈지 하악질을 멈췄다. 그러더니 곰이 옆에 찰싹 붙어서 형제인 척을 하니 내 가족이 될 고양이가 맞나 보다.


산이는 3년 전에 정말 큰일 날뻔했다. 울산으로 이사를 와서 바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샌가 산이의 허리가 잘록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았더니 살이 너무 많이 빠져있었다. 그 좋아하던 츄르간식도 먹지 않아서 바로 동물병원을 찾아갔다. 이사스트레스로 인해 밥을 그동안 먹지 않아서 지방간 진단을 받았다. 작은 가방에 넣어진 채 버려졌었는데.. 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케이지에 너무 오래 있었다. 초보집사의 큰 실수였다. 바로 입원을 하고 코에 수액을 연결했지만 점점 심각해졌고 산이는 축 쳐진 채 엄마만 애처롭게 쳐다보며 숨을 헐떡였다. 그러던 중 주변 캣맘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옮기고 목에 삽관수술 후 불린 사료를 갈아서 주사기로 하루에 5번 급식을 하고 약을 먹이면서 서서히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0일 동안 입원한 입원비는 500만 원 가까이 청구되었고 차를 바꾸려고 열심히 모으고 있었던 적금을 깼다. 산이 이름을 오백이로 바꿔야 되나 고민을 했지만 우리 산이는 퇴원을 한 이후에 엄마의 껌딱지가 되었다. 꾹꾹이와 골골송은 기본이고 발옆에서 5년을 자면서 곁을 내어 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른쪽 겨드랑이가 우리 산이의 지정석이 되었다.





두 아들이 편하게 합사를 해서 용기가 생겼다. 가족은 4명이 되어야 마음이 편했는지 어느새 다시 6년 만에 고양이 밴드에 접속을 했고 우리 송이를 만났다. 똥꼬 발랄한 아기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는데 치즈색의 고양이가 앞발에 덧신을 신은 것처럼 하얀 털에 마음을 홀랑 뺏겨버렸다. 송이는 울산의 길고양이인데 뻔뻔하게도 세탁소에 들어와서 밥을 요구했다고 한다. 오빠들처럼 가족으로 잘 합사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송이가 우리 집에 처음 도착을 했다. 하지만 우리 집의 까칠 대장 산이가 송이를 여동생으로 인정하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산이는 송이에게 하악질에 신경질도 엄청 부렸는데 애기송이의 뻔뻔한 성격 덕분에 합사에 성공을 했다. 지금도 옛 기억 때문인지 송이가 산이가 지나갈 때 무심하게 발을 걸거나 목덜미를 갑자기 물어버리는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꽤 사이좋은 삼 남매가 되었다. 애기송이는 똥꼬 발랄하게 잘 커주었고 곰이는 송이를 자기 새끼처럼 매일 그루밍을 해주고 있다.





'동물은 사람을 배신을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아주 비싼 사료를 주지는 않지만, 자주 사냥놀이를 해주고 있고, 화장실 청소가 귀찮아서 며칠 미룬 적도 있지만, 종종 간식을 잘 챙겨주는 그런 집사가 되었다. 이렇게 나는 지금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그렇게 꿈꾸었던 4명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집을 만들었다. 곰이는 때론 든든한 남편이자 나를 지켜주는 아빠가 되어 주었고, 산이는 사춘기 아들처럼 엄마 애간장을 녹였지만 함께 체온을 나누며 잠을 자고, 막내딸 송이의 애교덕에 매일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쳐다봐주는 세 마리 고양이 덕분에 열심히 일도 하고 사랑도 듬뿍 받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해줄까?' 항상 세 마리가 내 곁에 옹기종기 있어줄 때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나는 사랑을 듬뿍받고 있는 집사가 되었다. 세 마리 고양이는 고양이의 도도함을 버리고 강아지처럼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에게 애교를 부리고, 엄마바라기로 오늘도 현관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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