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 읽기를 하며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시간은 너무 행복했다. 오후 1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아파트를 옮겨가며 토요일까지 수업을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대신 오전에는 수시로 링거를 맞아야 했었고, 꾀꼬리 같았던(?) 내 목소리는 점점 걸걸하게 쉬어갔다. 아이들에게는 "선생님 목소리가 계속 섹시해서 큰일이다 그지~?" 라며 농담을 던질 때가 많아졌고, 아이들은 이런 나의 농담도 재밌어하며 내가 하는 질문에 재잘재잘 대답도 하고 글도 열심히 쓰니 너무 이뻤다. 내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 못한 한을 이렇게라도 푸는 것 같아서 이 또한 행복이었다. 방문교사라는 직업은 나에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두 딸을 키울 때 학습지를 꼼꼼히 선택해서 수업을 들었었는데, 어떤 선생님이 좋고 어떤 선생님이 별로라는 것을 엄마로서 학습이 되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문교사 선생님이 수업을 할 때 '이런 선생님이 좋았다'라는 점을 그대로 따라 했더니 어머니들께 인기가 좋았다. 수업을 빠졌을 때 보강을 꼼꼼하게 챙겼고, 어머니들과 수시로 수업결과를 상담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학습지교사였지만 학교선생님 못지않은 자부심과 올라가는 급여를 보며 작지만 소중한 경차도 하나 구입했다. 차가 생기니 이동이 더 편리해지고 수업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본사에서도 병아리 신입교사가 전집을 판매하고 많은 아이들을 단시간에 등록을 시키니 우수교사로 인터뷰도 하고, 사보에 사진도 실어주었다. 그렇게 본사 관리자들에게 눈도장이 찍히기 시작했다. 2년 차 교사가 되었을 때, 나의 수업노하우를 새로 입사한 신입교사들에게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주임교사로 승진을 했다. 주임교사로 승진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갑자기 닥친 코로나로 인해 수업에 비상이 걸렸고, 화상수업을 하면서 근근이 수업스케줄을 소화해 낼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위 관리자인 광역국장님과의 개인 면담 후 퇴직금도 없는 계약직 교사가 아니라 정직원으로 승진을 하여 센터운영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랬다... 이때 나는 승진을 거절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직원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나는 결국 센터 관리자로 승진을 했다. 사실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교사들 평균나이에 비해 어린 편이었고, 나이도 많고 오래 근무한 교사들을 제치고 3년 만에 센터 관리자로 승진을 한 나는 동료선생님들께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가 많은 삶을 살아왔는데... 관리자로 근무를 하는 3년 내내 사람들의 의한 상처에 상처가 더해졌다. 아물 시간도 없이 상처를 계속 받았고, 내 삶은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그리고 관리자의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잦은 회의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출장이 있는 날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다. 출장은 대전, 대구, 포항, 울산, 창원 등 각지로 뛰어다녀야만 했고, 그 사이사이에 선생님들을 관리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또한 센터장업무가 한 지역에서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2~3년 주기로 타 지역으로 발령이 나는 경우도 있어서 나는 태어나 40년을 살아온 부산을 떠나 울산으로 발령이 났다. 낯선 도시, 낯선 교사들과 함께 일을 해야 했지만 만들어진 'E'의 성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에도 사람들이 있었고 어김없이 나에게 비수를 꽂아대는 사람들이 또 생겨났다. 결국 2023년 11월 회사가 어려워져 센터 관리자들에 대한 권고사직이 내려졌을 때 거기에 슬쩍 끼여서 퇴사를 했다. 본사에 친하게 지냈던 팀장님들이 나의 권고사직을 믿기지 않아 하셨지만 당사자인 나는 속이 후련했다.
퇴사를 하고 실업자가 되었지만, 구직급여를 받으며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숨 쉴 틈 없이 바빠서 좋아하던 여행도 못 갔는데, 쉬는 동안 두 딸과 함께 베트남 달랏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친구랑 나트랑여행도 가고 막연하게 가고 싶었던 오키나와도 다녀왔다. 그리고 국제바리스타 자격증과 라테아트시험에도 통과해서 자격증을 땄다. 제과수업을 들으면서 커피와 어울리는 각종 디저트 만들기도 배웠고, 앙금플라워와 예쁜 화과자도 수업을 들으며 잊고 있었던 나의 손재주를 다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구직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많은 것은 배우고 여행하며 지난 세월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렸던 나에게 스스로 선물 같이 주어진 시간을 만끽했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여행을 다니다 보니 슬슬 앞으로 뭘 먹고 살아가야 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며 가장 행복한 때를 떠올려보니 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그렇다면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것인가? 울산에 머물 것인가? 고민이 되었다. 내 고향 부산도 너무 좋지만 울산에 살다 보니 어느새 울산사람이 되어 버렸나 보다. 울산에서 새롭게 인연을 맺은 좋은 사람들로 인해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울산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다시 해보기로 최종 결정했고, 퇴사했던 회사에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 교사로 다시 복직을 했다. 작은 아파트를 하나 계약하고 공부방으로 정성껏 리모델링을 했다.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행복하게 아이들과 다시 수업을 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 공부방 오픈 6개월째, 새로 만난 아이들과 어머님, 아버님들과 함께 소통하며 매일매일 새로운 행복을 그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