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공연
드디어 결전의 그 날이 왔다. 연말 페스티벌.
말이 페스티벌이지 사실은 학원 수강생 어른이들의 재롱잔치였다. 예상 관객은 주로 공연자의 가족들.
관객석은 쓸데없이 많았다. 나는 그 재롱잔치에 가족들은 초대하지 않았다. 보여줄 만한 실력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았다. 나도 눈과 양심이 있으니까. 영원히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언제 그 실력이라는 게 생길지 확신도 없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 보여주기 쪽팔렸다.
나의 관객은 세명이었다.
한 명은 나와 함께 사는 동생 재희. 재희에게는 상황 특성상 비밀로 할 수 없었다. 재희는 밤이면 밤마다 창문을 거울 삼아 흐느적거리는 내 모습을 강제 관람했다. 굳이 더 볼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뻔히 그런 짓을 하는 걸 아는데 초대를 안 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초대했다. 재희 역시 초대를 당했는데 안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둘 다 내키지 않는 초대였다.
다른 한 명은 헤어디자이너가 꿈인 친구였다. 다시 말해 아직 헤어디자이너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내 헤어 스타일을 손봐주겠다며 왔고, 내 정수리에 은펄을 잔뜩 뿌려주었다. 조명을 받으면 정수리가 반짝거린다나 뭐라나. 그 은펄이 비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은 나를 이 세계로 밀어 넣은 바로 그 남자 친구. 나의 율군. 나는 그에게 결투장 같은 초대장을 보냈다. 그냥 이판사판이었다.
‘반년 전 너의 질문에 대답해줄게. 00월 00일 00시에 00홀로 오라.’
첫 공연 준비는 의식의 흐름에 맡겼다. 그것도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일단 짐을 쌌다. 사선 끈의 벌건 공연복, 크기 순으로 정열 시키면 우승했을 법한 금속 덩어리들, 낙타의 것을 뜯어온 듯한 속눈썹 그리고 집구석에 굴러다니는 온갖 화장품들. 그걸 죄다 여행용 캐리어에 쓸어 담아서 집을 나왔다. 그저 가출하는 모양새였다.
우리는 공연 3시간 전에 집합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불안하니까 일찌감치 만났다. 우리말고 다른 팀들도 나와있었다. 녀석들, 초보 티내긴.
밸린이들 재롱 잔치의 흔한 대기실 모습.
일단 모두 돗자리를 챙겨 온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3 시간을 하염없이 앉아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헤어롤로 머리를 말아 올린다. 헤어디자이너가 꿈은 친구는 내 정수리에 은펄을 뿌려준다. 친구가 뭘 뿌려대니 너도나도 다 뿌려달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팀 전원의 정수리에 은펄이 뿌려졌다. 그리고 화장을 시작한다. 우리 팀 전원의 아이섀도를 합치면 50개쯤. 립스틱을 합치면 30개쯤. 우리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발라본다. 시간도 많으니 고민할 것도 없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처바른다. 바르면 바를수록 우리 아름다운 선생님은 “더 두껍게, 더 진하게”를 외치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눈화장 완성이다. 그러면 낙타 속눈썹을 붙인다. 어차피 내 눈은 아이라인 덮밥이 되어있으므로 아무 데나 대충 붙여도 된다. 자, 이제 뜨기 힘든 눈이 되었다. 이제 볼터치와 펄 작업을....
이 모든 것을 집에서 해와도 된다는 사실을 밸린이들은 모른다.
그리고 밸리복을 입는다. 우주복도 아닌데 이 또한 하염없이 오래 걸린다.
준비를 마치면 마냥 기다리면 된다.
공연 시작 20분쯤 전에 나의 관객들이 도착했다. 재희가 대기실로 살금살금 오더니 갑자기 내 손에 두 개의 알(?)을 쥐어주고 뛰쳐나갔다. 이건 뭐지? 몰래 봐야 하는 건가? 떨리는 마음으로 살그머니 손을 펴보았다. 청심환이었다. 오우, 센스 있는 녀석같으니.
난생처음으로 청심환이라는 것을 먹어봤다. 그리고 그것이 근육은 풀어줄지언정 긴장감을 풀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감으로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다리 근육은 풀려서 몸은 무너질 것 같았다. 이러다간 일을 치를 것 같아서 아름다운 선생님께 고백했다.
“선생님, 저 약을 복용했어요.”
어렸을 때는 그것을 소똥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약을 복용한 느낌이었다. 약의 정체를 아신 아름다운 선생님께서는 막상 무대에 오르면 괜찮아질 것이라 하셨다. 무대 위에서의 긴장감이란 그 어떤 약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공연에만 집중하자.
공연할 때는 3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일단 웃어야 한다. 웃으면서 동시에 배에 힘을 줘야 한다. 이건 내 명예가 달린 일이다.
그리고 안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건 내 생명이 달린 일이다.
누가 그랬나. 조명발 있는 무대에 올라가면 관객석이 안 보인다고... 다 보인다.
웃고 있는 율군, 너 웃지 마. 기분 나빠.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치는 신재희... 너도...
아 그런데 신재희 너 왜 우는건데?
3분 후, 우리는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여기서 무사히란 그저 무대에서 살아서 내려온 상태를 말한다. 풀리려는 다리 근육을 잡느라 뱃살을 신경 쓰지 못했고, 머리에서 새어나가려는 안무를 잡느라 얼굴을 신경 쓰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은 얼굴로 웃느라 안면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는 이 3분을 위해 그 난리를 피운 것이었다.
그렇게 영혼이 탈탈 탈곡 되어 무대에서 내려오니 내 율군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꽃다발을 건네줬다. 난 꽃다발보다 니 얼굴이 더 좋은데 뭘 굳이...
대기실에서 아름다운 선생님이 내 귓가에 슬쩍 말했다.
“남자 친구가 애교가 많은가 봐요.”
당연하죠. 선생님.
내가 어떻게 쟁취한 인연인데...
어쨌든 해냈다. 내 첫 공연.
덧붙1.
헤어디자이너 꿈나무 내 친구는
결국 멋진 헤어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멋진 친구야. 고맙고 사랑한다.
5화는 다음 주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