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감이 만든 흑역사
인간이란 무릇 작건 크건 찐한 경험을 하고 나면 자신감이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근거 같은 건 없다. 그냥 솟아오른다. 나에게도 연말 페스티벌이 그러한 것이었다.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나의 내면에서는 자신감이란 게 용솟음쳤다. 그것도 춤에 대한 자신감이. 이 미친 자신감은 결국 폭주했고, 부작용이 일어났다.
“지금 당장 나이트 가자.”
나는 이 정신 나간 주문을 바로 받아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선화 언니, 미주, 상연...
“콜. 몇 시에 만나?”
“헐.... 어디서?”
“미친? 갑자기?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세팅하고 와.”
문자를 보낸 지 5분 만에 뜨거운 반응들이 돌아왔다. 세팅하고 오라는 선화 언니의 명령을 받아 밸리 수업이 끝나고 바로 화장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름다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디 가세요?”
“네. 약속이....”
“공연할 때 그렇게 화장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그때 그건 선생님께서 주문하신 모양새였잖아요. 뭔가 억울했지만 늘 그렇듯 반항할 수는 없었다.
우리 4명은 신림의 00 나이트 앞으로 집결했다. 문 앞의 문지기들을 무사통과하고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웅장한 비트를 즐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자리를 선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바닥 국룰이었지만 특별히 부탁했다.
“홀이랑 가까운 자리로요. 우린 춤 출거거든요.”
우리의 자신감 쩌는 멘트를 들은 직원은 ‘아, 즐거운 친구들이 왔구나.’를 눈치채고 우리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나이트는 입장은 함께 해도 일단 들어가면 각개전투다. 우리 4명은 각개전투를 하다가도 댄스 음악만 나오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서 모여서 춤을 췄다. 선화 언니가 가끔 디제이에게 춤에 관한 지적을 한 마디씩 들었지만 뭐, 내가 들은 거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춤을 추다가도 댄싱 타임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그 시간 역시 대부분은 바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나는 내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고 담당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요. 내 일행 어딨어요?”
“둘은 어딨는지 모르고 한 명은 저깄네요.”
직원이 가리키는 쪽을 올려다보니 2층에서 선화 언니가 신발을 벗은 상태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선화 언니의 뒤에는 직원 한 명이 언니의 신발을 들고 허겁지겁 쫓아다니고 있었다.
“아뇨. 내 일행 아닌데요.”
“맞는 거 같은데?”
“아뇨. 저 사람 말고 정상적인 사람 찾아줘요.”
그렇게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상연이 있는 곳, 13번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상연은 정중앙 상석에 앉아있었고, 이미 그 방 사람들과 베프가 되어있었다.
“어? 꾹! 왔어? 양주 먹을래?”
상연의 13번실 베프 중 한 명이 그 말을 듣자마자 양주에 실론티를 말아서 내 앞에 내어놓았다.
“어우, 무슨 양주에 실론티야. 촌스럽게. 나 스트레이트로 줘.”
라고 한 모금 마셨는데.... 와우, 이거구나!
나는 양주에 실론티 혼합 음료를 연거푸 마셨고 , 실론티가 다 떨어지자 다른 실론티를 찾아서 떠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상연의 13번실 베프 중 한 명이 나를 잡더니 실내의 전화기를 들고 직원을 호출했다.
“여기 양주 한병, 실론티 10캔 더 갖다 주세요.”
“아니야. 나 화장실 갔다 다시 올게.”
여기 이 곳에서는 ‘화장실 간다’는 말은 가장 신용도가 떨어지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다시 올 생각이었다. 왜냐면 여기에 상연과 상연의 13번실 베프들 그리고 실론티가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13번실을 떠났다가 그곳을 다시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직원이 나를 잡더니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아, 어디 가요? 나 아까 그 친구한테 갈 거예요.”
“아까 그 친구한테 데려다 줄게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 친구 13번에 있는 거 알아요.”
여기선 또 ‘어디에 친구가 있다.’는 직원들의 말 역시 믿을 것이 못 된다.
“와, 속고만 살았나. 진짜라니까요.”
그렇게 나는 5번실로 안내되었고 그곳엔 정말로 상연이 있었다. 뭐지? 내가 취했나? 눈을 부빗부빗하고 다시 봐도 상연이었다.
“오! 꾹! 왔어?”
데자뷰인가? 상연은 이번에도 정중앙에 앉아있었고, 13번실에서와 마찬가지로 5번실의 사람들과도 베프가 되어있었다. 와우, 이런 미친 친화력의 소유자 같으니라고.
나는 감탄을 하며 상연에게 속삭였다.
“야! 대박! 언제 옮겼어? 순간 이동했냐?”
“뭐? 왜? 뭐? 뭔 일인데? 문제 있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아, 얘도 지금 정상은 아니구나. 나는 상연에게서도, 상연의 5번실 베프들에게도 진실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홀에서 댄싱 음악이 흘러나왔고, 상연은 느닷없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하..... 나 여기 왜 온 거니.
“야, 이 미친x아! 니 5번실 베프들은 어쩌고!”
나는 머뭇머뭇하다가 슬그머니 따라나갔다. 죄송합니다. 쟤 때문에 온 거라서.
시간은 새벽 한 시, 무대 위에선 댄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와, 댄스 대회라니, 감탄을 하며 무대를 올려다본 순간 미주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쟤가 저기 왜 올라가 있지? 무대라면 높든 낮든 다 올라가는 친구였지만 저기도 올라갈 줄은 몰랐다. 그런데 옆에 선화 언니도 있었다. 대회 참가자 4명. 그중 반절이 내 일행이었다. 젠장.
선화 언니가 첫 타자였다. 근데 저 언니 춤 못 출 텐데.라고 생각하는 찰나 선화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는 나에게 윙크를 날리더니 재킷을 벗어서 냅다 집어던졌다. 아 진짜! 미리 예고 좀 하라고 이 인간들아! 선화 언니의 윙크는 대충 ‘내가 재킷을 던지면 그걸 잡아라. 비싼 거니 놓치지 말아라.’라는 뜻이었다. 재킷을 잡으러 뛰어가느라 선화 언니의 무대는 보지 못 했다. 씩씩대느라 미주의 무대도 보지 못했다. 내가 보든 말든 미주는 2등, 선화 언니가 3등을 했고, 우리 테이블엔 그 보상으로 양주와 맥주가 놓였다. 근데 선화 언니한테도 밀린 4등은 도대체 무대 위에서 어떤 춤을 춘 걸까.
어쨌든 우린 미주와 선화 언니 덕분에 더 이상 음료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4명은 오붓하게 음료를 깨끗이 비우고 가방을 달라고 씨름할 필요 없이 홀가분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가방은 가지고 오지도 말고 맡기지도 말라는 선화 언니의 충고 덕분이었다. 이래서 경력직이 좋은 거구나.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보상으로 받은 양주 덕분에 집에 오자마자 아래 위로 다 쏟아냈다. 오장육부를 뽑아낼 기세로 쏟아낸 우리는 그 다음날 전원 휴가계를 제출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나 이 말 저번에도 한 거 같은데....
덧붙1.
사실 이 추억은.... 수많은 흑역사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서 한순간이라도 웃으셨다면 저는 그걸로 행복합니다.
그 김에 구독자님이 더 생긴다면 더 좋구요...
더불어 제 글로 인한 피해자는 없어야 하기에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전부 창작입니다.
늘 그렇듯이 사건은 실화 바탕입니다.
그리고 13번실에서 5번실까지의 순간이동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발 술 먹고 필름끊기지 말자 친구들아.
이 날의 추억과는 관련 없는 사진입니다.
코로나가 없는 저 때가 그립습니다.
더불어 양주&실론티 혼합 추천합니다.
6화는 다음 주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