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는 엄마

by 엄마 영어 선생님

첫째와 남편과 24년 말쯤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남편 아이와 함께하는 첫 장거리 여행이라 무척 설레고 긴장됐다. 만 3세가 갓 지난 첫째가 13시간의 장거리 비행기를 잘 버틸까,부터 입맛에 안 맞아서 음식을 못 먹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까지 다양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미국까지 간 김에 그랜드캐년은 꼭 보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그랜드캐년 투어를 신청했다. LA에서 시작해 3박 4일 동안 캐년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투어였는데, 엄청나게 긴 버스 시간에 아들이 너무 걱정됐다. 힘들다 투정 부려서 버스 안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웬걸 어른보다 더 즐기며 차장 밖을 구경하는 모습에 버스 안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남편이었다. 여행에 심취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우리는 결국 일을 냈다.

그랜드캐년은 거진 4번은 가본 나인데, 길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그 뒤에는 경비행기 체험이 신청돼서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스케줄인데…. 너무 장엄한 풍경에 심취한 나와 남편이 그룹과 흩어지면서 이 사달이 나버렸다.

워낙 넓은 곳이라 도저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 눈물까지 났다. 아이 앞에서 엄마가 울면 안 된다 하지만, 여긴 미국이라고.. 미국은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더 잘 아는 나이기에 덜컥 겁이 났다. 울며 뛰어가는 나의 모습이 아이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거 같다.

다행히 한 한국인 무리가 우리를 찾아주어 투어그룹에 다시 참여할 수 있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 봐도 아찔하고, 우리 때문에 일정이 밀리게 된 모두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아이가 잊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미국에서 길을 잃었잖아, 그때 엄청 무서웠어. 하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고, 심지어 길을 살짝만 헤매도 아이가 더 패닉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래서 엄마가 더 차분하게 연기해야 하는구나.. 나의 작은 놀람에 아이는 배가 되게 놀라는구나.. 싶어 아이에게 무척 미안했다. 의젓한 아들이 엄마의 연약함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엄마의 역할은 거대한 바다처럼 깊은 심연을 가지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작은 돌멩이가 주는 충격에도 끄떡없는 깊은 심해를 본받아야겠다.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아들들이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불안하면 아이는 배가 아닌 제곱으로 불안하다는 걸 항시 잊지 않고 행동해야겠다. 연기를 참 못하는 나인데, 아이덕에 연기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엄마는 아이의 인생에서 주연급 연기자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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