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by 붉나무

서은이는 두 달 동안 거의 아침마다 보건실에 들렀다.

춤을 배우는 시간인데 자기는 춤을 못 춰서 걱정이라고 했다. 자신 때문에 공연을 망칠 것 같다고도 했다. 서은이가 그런 걱정의 말을 할 때, 나는 처음엔 이런 말을 해주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춤은 모든 사람이 춤꾼이 되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다. 춤을 배우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다. 그러니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보고 표현해 보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춤, 저런 춤 다 춰보는 게 지금은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못해도 괜찮다라고, 같은 말을 바꿔 가며 해주었다. 그런데도 서은이는 올 때마다 춤 시간이 싫다고 말했다.


평소 말이 거의 없고 친구는 오로지 한 명과만 다니는 서은이는 예술제를 며칠 앞두고, 자기가 춤을 못 춰서 친구들이 자기 때문에 망쳤다고 할까 봐 더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매일 똑같은 말을 해줄 수는 없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춤출 때 아이들은 정작 자기 춤을 추느라 너를 보지 않아. 그리고 아이들을 보는 관람객은 잘 추고 못 추고를 보지 않는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서은이의 춤 걱정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엔 친구가 자기를 자꾸 쳐다보았다며 얼굴이 시무룩해져 왔길래, 나의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생님도 춤을 못 추는 사람이어서 무용 시간이 싫었고, 무용 실기는 최하점을 받았노라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노라고. 그리곤 서은이가 보건실을 나갈 즈음, 엉터리 막춤을 춰 보였다. 그날 서은이는 처음으로 얼굴을 펴고 깔깔대며 교실로 돌아갔다. 이후 서은이는 보건실에 오지 않았는데, 예술제가 있던 날 다친 친구를 따라 보건실에 왔을 때, 서은이에게 춤을 잘 추더라고 말해주었다.


여고에 다녔던 나는 1학년 한 학기 동안 의무적으로 무용 수업을 받아야 했다. 춤이라는 걸 한 번도 춰본 적이 없고 몸이 뻣뻣한 내가 무용 시간이 좋을 리 없었다. 안 해봤던 동작들로 몸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무용 선생님은 무용 시간엔 키 큰 사람을 맨 앞에 세웠는데, 당시 키가 컸던 나는 맨 앞줄에 서야 했다. 그러니 어설픈 내 동작이 선생님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한 번은 실기 평가를 앞두고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얘들아 봤지? 이렇게 하면 실기 점수 빵점이다.”라고 했다.

사실 나는 나름 실기 시험 동작을 연습하려고 애썼지만, 무용 선생님이 원하는 동작을 표현해 내기가 어려웠고 이 말을 들은 후부터는 마음까지 긴장해 몸은 더 굳어지는 것 같았고 팔다리는 제각기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시험 점수에 들어간다니 순서를 잊지 않으려고 연습장에 졸라맨을 그려 기억해 두었다. 하지만 뻣뻣한 관절은 시험 당일 긴장과 함께 당연히 더 어색한 동작을 연출해 냈다. 선생님이 그렇게도 강조한 곡선과 다리 찢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유연성은 최하점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당시 더 연습했다면 더 나아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무용 선생님의 어이없다는 그 표정에 화가 나서 일부러 연습을 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열심히 공부하려는데 공부 제대로 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더 하기 싫듯,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심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내게 어설픈 동작을 시연해 보이라고 한 건 지금 생각해도 모욕이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최선을 다한 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 테고, 어쩌면 더 이상한 동작을 해서 친구들을 웃겼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괜찮아. 노력해도 잘 안 되는 게 있는데 그냥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해. 전보다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거야. 유연성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노력하면 좋아져'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런 말을 들었더라도 자존심을 버리고 내가 느낀 부끄러움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누군가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덜 속상하지 않았을까. 낯선 타지에서 처음 만나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기에 속상함을 털어놓을 만한 친구가 없었다. 1학년 신학기이니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던 때다. 그래서 더 의기소침했던 것 같다. 낯선곳에 적응할 시간 없이 아이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반면 나와는 반대로 무용 시간만 되면 칭찬을 듣던 선영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마치 무용수를 하려고 태어난 아이처럼 긴 팔다리, 작은 얼굴,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온몸에 흐르는 유연함을 감출 수 없는 아이였다. 어느 날 무용 선생님이 선영이에게 “너는 딱 무용을 해야 할 체형이다”라고 말한 이후, 모든 것에 흥미가 없던 선영이는 무용과를 목표로 자신의 재능을 살려야겠다며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선영이는 내 앞자리에 앉았는데, 야자 시간만 되면 의자를 반쯤 옆으로 돌려놓고 앉아 조잘조잘 떠들기 일쑤였다. 아르바이트를 구한 후에는 야자 시간을 빼먹을 생각을 하느라 6교시만 되면 오늘은 어떻게 땡땡이를 칠지를 궁리하며 떠들어대서 주변에 앉은 아이들 마음까지 들썩이게 했다. 선영이는 어떤 날에는 책을 펴놓고, 어떤 날에는 가방도 그대로 둔 채 야자를 빠지는 일이 잦았다. 선생님에게 들켜 다음 날에는 호되게 혼이 나는 날도 있었다.

혼이 나도 선영이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를 중단하지도 않았다. 당시 학교 방침에 따라 의무적으로 야자를 했던 때라 선영이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몰래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차마 선생님께 말하기도 곤란했던 것이었으리라. 선생님도 언젠가부터는 선영이의 처지를 아는 것인지 가끔은 혼을 내지 않는 날도 있었다.

우리는 선영이 사정을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께도 함구하는 것이 선영이 처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선생님께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용의 재능을 타고난 선영이를 나는 무용 시간만 되면 부러워했지만, 그렇다고 야자를 빼먹고 혼이 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선영이의 처지가 나보다 나은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선영이는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었고 지각도 잦았다. 수업 시간에 졸기도 잘해 거의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혼나기 일쑤였지만, 무용만큼은 정말 잘해 칭찬을 들었다.

그랬던 선영이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공부가 재밌어? 너 혼자 지내는 거 안 힘들어?”

사실 나는 선영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학교에 오는 순서로 따지자면 선생님이 학급 열쇠를 맡길 만큼 이른 시간에 갔으니, 선영이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테다. 게다가 숙제는 완성도를 떠나 빠뜨리지 않고 했고, 야자도 성실히 했다. 말하자면 공부 시간에 딴생각을 하며 졸기도 많이 졸았지만, 몰래 졸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척이라면 일등을 놓치지 않은 학생이었던 것 같다.


책을 펴놓고 연습장에 까맣게 영단어를 썼지만, 머리에 들어오는 단어보다 놓치는 단어가 더 많았다

수학 문제를 풀라치면 생각이 딴 데로 흘러 어려운 문제는 애초에 포기해 버렸다. 긴장도 많이 하고 집중력이 짧아 쉬운 수학 문제도 칠판에 나와 풀라고 하면 이미 풀어본 문제를 다시 틀리곤 했다. 수업 시간과 야자 시간의 절반은 다음 날 아침엔 무엇을 먹을지, 빨래를 해야 하는데 빨래가 마르지 않으면 뭘 입을지, 주말엔 집에 가야 할지 안 가는 게 좋을지, 마트에서는 어떤 찬거리를 살지, 엄마 아빠는 어떻게 지낼지, 뭐 그런 걱정으로 흘려보냈던 것 같다. 공부 시간에 당연히 집중을 잘하지 못했고, 그러니 공부에 들이는 시간에 비해 성적은 갈수록 만족스럽지 못했다.


장마철이 시작된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선영이는 야자 감독 선생님이 자기를 찾으면 화장실에 간 것 같다고 말하든지, 잘 모르겠다고 둘러대 달라고 당부하고 야자를 빼먹었다. 그날 밤이었는지, 그 주말이었는지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그날 이후 선영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많은 비로 그 마을의 축대가 무너져 가족 중 일부가 참변을 당했고, 그중에 선영이가 포함됐다는 건 나중에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되었다. 그렇게 선영이는 떠났고, 내 앞자리는 오래도록 빈 자리로 남아 있었다. 이후 비가 오거나 무용 시간이 되기만 하면 선영이가 뒤돌아앉아 했던 말들이 떠올라 한동안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 선영이를 통해 겉모습이 화려하고 늘 웃고 다니는 아이에게도 저마다의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또 그런 어려움 속에서 꿈을 찾아 애쓰는 것을 획일적인 교육 제도가 짓밟아버리기도 한다는 것, 그것을 오롯이 감내하는 일이 개인의 몫이며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그런 것들을 느낀 것 같다. 말하자면 가난한 삶에서는 안전이 훨씬 멀리 있어, 때로는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 같다.

나는 그때 춘천에서의 자취 생활이 힘들고 외로워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더러 했었다. 하지만 여러 번 고민해 본 끝에, 내가 고집을 부려 나왔으니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 그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버거웠다. 무엇보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잠부터 쏟아졌고, 해야 할 일이 떠오르면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공부도 되지 않았다. 급식이 없던 당시, 세 끼 식사를 라면 과자 등으로 부실하게 때우다 보니 체력은 한계에 이르렀고, 잠들어도 밤잠을 자주 설쳤으며 깨어 있는 시간엔 늘 졸렸다. 가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아버지를 졸라 도시로 나왔으니 힘들어 죽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때 그런 말을 했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아… 괜히 나왔나 보다’ 하고 가끔 후회해 볼 뿐이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그 3년의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는 자존심과 오기로 버텨야 할 때가 있다. 나에게 지금은 버려야 할 것들이 한때는 버텨내는 힘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런 것들을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움켜쥐고 있다면, 그것 역시 문제일 것이다. 이제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사람을 오래 버티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춤을 못 춘다는 아이의 걱정을 들어주다가 무용 시간이 싫었던 과거의 내가 떠올라 그 아이의 고민이 이해되었고, 마치 과거의 나를 찾아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하고 싶은 것을 찾았지만 꿈을 한 번 펼쳐보지도 못한 채 홀연히 떠나기도 한다는 것, 그런 일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기억한다는 일은 그렇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몫을 조금씩 나누어 사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모두 더 잘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춤을 못 춰서 걱정이라는 아이’를 통해 다시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