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서 내가 살았던 자취방은 방과 부엌이 딸려있었으나 방에서 바로 부엌으로 갈 수 없는 구조였다. 부엌에 가려면 툇마루로 나와 신을 신고 서너 걸음 걸어야 부엌문이 있었다. 문이라곤 하지만 못쓰는 나무판자를 모아 만든 허접한 문이었다. 밖에서 안이, 안에서 밖이 다 보이는 그런 문 말이다. 햇빛 바람 겨우 가리는 그런 한 평 남짓의 지붕이 있는 공간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부엌에 수도와 싱크대가 없었으니 그릇 냄비를 놓을 곳도 없는 그런 곳, 좁은 부뚜막은 연탄불을 지피기 위해 만든 부뚜막이라고 보면 되겠다.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으로써의 기능이 없는 그런 방이 나란히 세 개 있었고, 내가 가장 안쪽 방을 썼다.
1호는 나, 2호는 상고에 다니는 한 살 위 언니, 3호는 대학생이었다. 그나마 내가 거주하는 공간에만 문이 딸린 부엌이란 곳이 있었고, 나머지 방 두 개는 그마저도 없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엔 자취방 세 개가 나란히 있고, 오른쪽으로는 ㄱ자로 된 기와집인 주인집이 있었다. 주인집도 툇마루가 있는 비슷한 구조였는데 넓은 툇마루와 깔끔한 기와집인 주인집은 허름한 자취방과 대조를 이루었다. 주인집과 공유하는 것은 마당뿐이었다.
자취생이 쓰는 공용 화장실은 마당 수돗가 앞에 따로 있었다. 화장실 문도 부엌의 판자와 비슷한 문을 달았는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문틈이 좁아 밖에서 안은 잘 안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안에서 바깥은 너무 잘 보였다. 그래서 볼일을 볼 때면 누군가 마당에 나올까 봐 무척 불안했었다.
창호지가 붙여진 자취방 문은 내가 시골에서 지냈던 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너무 허름했다. 잠금장치는 고리 하나,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쉽게 문을 열 수 있는 그런 문이었다. 방에는 쪽창이 있었는데 창문은 내 키 높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 것은 창밖으로 얼기설기 녹슨 쇠창살이 고정돼 있었다. 그 창은 밖이 보이지 않게 창문 안쪽을 창호지로 발라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바로 알게 됐다.
좁은 골목과 접해 있는 쪽창은 지나는 사람들의 키 높이였고 말소리는 방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특히, 그 창밖 골목길은 인근 남고 아이들이 지나는 길목이었다.
그 집에서 일주일 정도 살면서부터는 창문으로 작은 돌이 부딪는 소리,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달아나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러다가 서너 달 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 방문을 열려는 시도를 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의 하단이 들썩들썩 움직였다. 나는 형광등을 켬과 동시에 “아저씨 아저씨”라며 고성을 질렀다. 그러자 황급히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났고, 이후 아주머니가 나왔을 때는 이미 발자국 소리 정체가 사라진 뒤였다. 아주머니는 다음에도 혹시 그런 일이 있으면 지금처럼 큰 소리로 부르라는 말을 하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저씨는 직업 군인이었는데 인사도 받지 않을 만큼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아저씨를 불렀지만 나온 사람이 아주머니라는 사실에 나는 그 이후 더 그렇게 아저씨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그 이후에도 두 번 비슷한 일로 아저씨를 불렀지만 그때마다 나온 분은 아주머니였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내가 부를 때마다 늦었지만 잠옷 바람으로 나오곤 했다. 문제는 늘 문을 열려는 범인이 달아나고서였지만.
그렇게 누군가 내 방문을 열려는 시도를 했던 때부터 나는 밤에 등을 끄지 않고 자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면 그제야 불을 껐다. 그런 내 두려움을 모르는 건지 모른 채 하는 건지 아주머니는,
“앞방 언니는 어제도 새벽까지 공부하다 자더라”라는 말을 본인 딸에게 자주 했다. 그런 말을 몇 번 들었지만, 나는 무서워서 그런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무섭다고 그 집에서 나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을 켜 놓고 자면서부터 방문을 열려고 시도를 하는 사람은 뜸해졌기에 그럭저럭 그 집에서 지냈는데, 그 집을 나와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난 어느 날 아침, 툇마루에서 흙발자국을 발견했는데 그 발자국이 내 방 마루에서부터 3호 방문 앞 마루에 멈춰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의문의 사람은 평소 술을 자주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3호 대학생이라 합리적 의심을 했다. 인사를 한 적도 얼굴을 자세히 본 적도 없는 대학생은 술친구들을 여럿 데리고 와서 밤새 시끄럽게 놀다 가곤 했기에 나는 그 오빠가 범인일 거라 거의 단정했던 것이다.
그런 일과 함께 내가 속히 그 집을 탈출해야겠다는 결심이 확고히 섰던 던 옆방 언니의 일 때문이기도 하다.
2호 옆 방 언니는 나를 보면 잘 웃고 인사도 잘하는 언니였다. 아침이면 앞머리를 잔뜩 둥글리고 말끔히 빗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다려진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그 언니의 차림은 어른들이 원하는 바람직한 고등학생의 본보기처럼 보였다.
그런 언니에게 내가 그 집에 이사 온 몇 달 후부터 이틀이 머다 하고 남자친구가 찾아왔다. 아니 밤늦게 찾아와 자고는 새벽에 나간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남자 친구(친구인지 정확히 모른다)에게 폭력을 당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언니가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 일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졌다. 이후 그 언니의 얼굴엔 점점 그늘이 짙어졌고 나와 마주쳐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나도 그 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괜히 미안하고 불편했다. 어떤 날은 그 언니가 새벽녘에 꽤 오랜 시간 울기도 했는데 나는 걱정이 되면서도 두려움에 모른 채 했다. 그 언니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무서워 꼼짝없이 그 언니가 괴롭힘을 당하는 소리를 옆방에서 다 듣고도 나는 모른 채 했으며 내 안위를 위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왠지 아는 체 했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 언니가 걱정되는 것보다는 얼굴도 모르는 그 언니의 남자 친구에 대한 무서움이 컸던 것 같다.
나는 열 달을 그 집에서 견디고 이사를 결심했다. 당시 옆방 언니가 무척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느꼈지만 주인아주머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냥 빨리 그곳을 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방을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답은 고모가 얻어준 방이고, 그 월세에 다른 데 구하기도 어려우니 당분간은 그냥 지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간 더 지냈지만, 시간이 갈수록 빨리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직접 방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부터 나는 등하굣길에 대문만 보고 다녔다. ‘월세 있음’이라고 쓰인 대문을 찾아 학교 근처 골목골목을 전부 돌아다녔다. 무작정 대문을 두드려 주인이 나오면 방세를 먼저 물어보았다. 빈방이 더러 있었지만 같은 금액의 방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학교 울타리와 접해있는 옹벽 위에 있는, 내가 살던 곳과 아주 흡사한 월세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집구조도 비슷했다. 다만 주인집과 떨어져 있으며 나란히 있다는 그 차이와 내가 바랐던 길 옆이 아닌 집이었다. 마침 그 집에 방이 하나 남아있다기에 나는 얼른 그 집으로 결정했다. 아버지에겐 이사를 다 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땐 어른 없이도 보증금 없이도 월세를 얻을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이사라야 참고서와 책들, 옷가지와 이불, 냄비와 그릇 몇 개가 전부이기에 혼자도 이삿짐을 나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널브러진 짐을 모으면 생각보다 몇 배나 되는 법, 나는 그걸 몰랐었다. 토요일, 일요일 꼬박 이틀을 나는 열 차례 넘게 짐을 옮겼다. 왕복 2킬로미터 정도를 열 차례 왔다 갔다 했다. 언덕과 언덕을 반복해 오르내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삿짐을 나르고 나는 탈진할 정도로 며칠을 앓았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듯 좋았다. 부엌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방이라 좋았고, 창밖이 옹벽이어서 한참 아래에 집들이 보여 좋았다. 누구라도 지나가며 돌을 던질 수 없는 구조였기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으리라. 연탄보일러가 아니면 연탄가스를 마실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집의 구조상 방문을 열려는 시도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부실한 연탄아궁이쯤은 내게 걱정할 대상이 아니었다. 연탄아궁이 틈으로 나온 연탄가스를 좀 마시며 살았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날부터 불을 끄고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사를 마치고 나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아버지, 이사했어요. 세는 전과 같아요. 학교도 더 가까워요”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아버지의 말은 들려오지 않고 깊은 한숨만이 길게 들려왔다. 아버지가 전화를 끊기 전에 한 말은 이 말 한마디였다.
“그래. 알았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니라도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고생했다. 혼자 이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내가 부모가 되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를 서울에 보내며 방을 얻으러 돌아다녀 보니,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아버지는 왜 더 좋은 방을 얻어주고 싶지 않았겠나... 아버지는 어쩌면 내가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라는 말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당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춘천에 갔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돌아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자존심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그런 꽉 막힌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그런 상태였다.
그날 아버지가 수화기 너머로 긴 한숨을 쉬었던 것은 멀리서 딸이 혼자 이사를 하게 한 것이 미안해서였을지 모른다. 혼자 이사를 하고 나서야 전화로 이사를 했다는 말을 해야 했던 딸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 말없이 이사를 해야만 했던 연유가 무엇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데서 오는 무기력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단지 적절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른이었기에 할 말을 찾지 못했을지 모른다.
우리에겐 긴 말이 필요 없다. 필요한 말이 필요할 뿐이다. 그 필요한 말은 언제나 때가 지난 후에 생각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서운했던 내가 정작 지금의 내 아이들에게 필요 없는 말을 늘어놓거나, 타이밍을 놓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은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때의 내가 살았던 방보다는 훌륭한 방을 아들에게 얻어준 나를 뿌듯이 여기기로 했다.
대학생 시절 반지하에 살았다는 남편과 산꼭대기 불안한 방에 살았던 내가 주말에 아들이 살 방을 계약하고 남산을 오르며 세월의 무상함과 30년 전보다 열 배의 월세를 주어야 하는 돈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우리 부모의 고단했던 삶보다는 더 나아졌지 않느냐며 서로의 가난했던 과거를 위로했다.
씁쓸했지만 단지 가난했던 청소년기 그 자체를 살아봤기에 서로를 좀 더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