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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Nov 29. 2022

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

버드나무와 포도나무가 보이는 자리


2019년 이전에 자주 찾았던 북카페, 출판단지에 있는 블루박스는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북카페다. 헌책에서 나는 냄새와 있어야 할 곳에 소담하게 놓여 있는 화초들 그리고 규격화되지 않은 책꽂이와 공간의 짜임새가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 몇 계단 오르면 편안한 소파 자리가 있다. 그 창 밖엔  키 큰 버드나무가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갈대습지와의 경계엔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나는 카페에 들어서면 버드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안쪽 창가 소파에 앉는다. 수령이 꽤 됐음직한 버드나무에는 새들이 자주 찾아온다. 새들을 발견하지 못한 날도 조금만 기다리면 새는 곧 날아온다.  


   이른 봄, 막 연둣빛 새싹이 돋기 시작한 버드나무가 바람에 하늘거릴 때 버드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조차 말끔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버드나무에게 까치와 직박구리가 날아오면 더없이 근사한 풍경이 된다. 근사한 옷을 입고 나갈 때 마음에 드는 액세서리를 하면 한껏 기분이 부푸는 것처럼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어느 날은  버드나무 맨 꼭대기에서 까치집을 발견했다.   한참 바라보다 보니 둘씩 짝을 지은 세 종류의 새들이 일정 구역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까치는 맨꼭대기 집 근처에서 놀고 그 아래 나무 중간쯤에는 직박구리가 벌레를 찾는 것 같았고, 버드나무가 뿌리를 내린  갈대 샛강에는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새들이 서로의 영역에서  조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나를 비롯해 인간은 타인의 영역을 넘나들며 타인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며 사는지... 나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누군가에겐 그럴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은 의도로 했던 말들이나 배려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아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감정의 어떤 부분이 건드려지면 들끓는 나를 내가 어쩌지 못할 때가 있다. 나에게 찾아오는 억울함, 화, 분노 이런 것들은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안다. 트라우마는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불현듯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분노가 차오르고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고  엉뚱한 곳에 분노를 터트리기도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없이 무너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럴 땐 우선 두 발에 의지해 걷고 나서 고요히 잦아들게 만드는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한동안 이 장소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이곳의 버드나무와 새들의 풍경으로부터 고요한 위로를 받곤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휴직을 했었다. 당시 아이를 등교시키고 메가박스 이채에서 조조할인 영화를 보고 이곳 카페에서 잠시 책을 읽기도 했었다.  육아와 일에 지친  나를 위한 시간이 목말랐던 때다. 충분한 시간을 누리진 못했지만 오전의 그 짧은 서너 시간이 주어진다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


  블루박스에서 블로그에 남긴 몇 편의  일기다.

  조조할인  영화  '인턴'을 보고 남긴 일기다.

  폭력 없는 영화,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영화다. 한 남성이 노년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사는 것이  멋진 삶인지 힌트를 얻고 싶은 이가 감상하면 좋을 영화 같다.

  일과 부부관계의 균형 그리고 갈등, 사랑,  인간관계와 소통 등이 잘 버무려져 모든 연령층을 만족시킬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편히 볼 시간도 늘 부족하기에 힘든 영화보다  편안하고 따뜻한 영화, 울림이 있는 영화, 나를 비춰볼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하는데, 오늘 본 영화가 그랬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인턴, 벤을 통해 몸은 늙어도 내면은 늙지 않는다는 거, 진짜 어른에 대해, 잘 늙는 게 어떤 건지도,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말해준다. 사실 누구나 다 멋지게 늙는 것을 소망하지 않나. 벤은 이런 사람이다.


70에 페북을 시작하는 할아버지

몇십 년 지난 빈티지 양복을 단정히 입는 사람

손수건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

누구나 와 잘 지낼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

쓸데없는 말보다 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필요할 때만 그 사람에게 맞는 적절한 말을 사려 깊게 해 주는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겸손한 사람


 '진짜 어른과 어른 대화를 한 것 같다'는 열정 많은 젊은 CEO의 말이 생각난다. 존경하고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태어난 시대에 그런 어른을 부모로 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행운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래서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나는 사실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부모가 되었다. 좌충우돌 정신없이 아이를 키운다. 늘 지금 내가 잘하고 있나, 뭐가 부족한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지금 아이들을 키우며 행복함도 많지만 속상하고 어려워 쩔쩔매는데 이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어떨까, 겁도 난다. 나는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너무 젊은 나이에 아프지 않고 잘 나이 들어야 할 것이다. 아프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너무 일찍 알지 않았나... 그게 엄마의 잘못은 아닐진대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얼마나 무기력해지던가... 그래, 내게 좋은 엄마랑 아프지 않은 엄마다. 아이들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는 엄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점에서 충분히 응원해주고, 밥을 차려주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테다. 그건  잘 살아간다는 뜻이고 잘 죽기 위한 노력의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블루박스 문발리 헌책방 골목에 들어서니,

파랑이 보인다

하늘이다

초록도 보인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긴다

하양도 보인다

초록과 파랑 사이를 오가는 구름이다

하늘은 얼마나 많은 푸름을 간직하고 있을까

또 구름을 얼마나 유동적인가

파랑은 색깔 자체로 마음을 씻어준다

파란 하늘은 그 자체가 위로다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 이토록 위로를 받는다니, 나는 분명 자연인이다.


만 원에 세 권의 책을 샀다. 모두 출간된 연도는 꽤 됐지만 표지가 빳빳한 새 책들이다.

책 두 권은 표지를 넘기니, 작가의 사인이 있다. 한 권은 누구나 한 권쯤 있을 어린 왕자 책인데 일러스트가 특이하다. 시적 문장으로 글을 발췌해 다시 쓴 것 같다. 책날개를 열어보니 편지글이 있다. 이 책을 쓴 일러스트 작가가 누군가에게 선물한 것 같다. 또 한 권의 책은 나 00 시인의 책인데 2004년에 발간된 시집으로 이 책 또한 시인이 지인에게 선물한 것 같다. 이 시집도 새책이다.

물론 새책이라고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책의 상태로 보아 마치 내가 첫 장을 넘겨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의 주인이 원래부터 나였던 것처럼 애정으로 읽어야겠다.

누군가에게 준 선물이 읽히지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 닿아 소중히 읽히기도 하는 것은 책에도 운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기다리다가 누군가에게 가 닿아 소중히 읽히는 것, 그래서 헌책방에서 가끔 책을 사는 것은 마치 내가 누군가의 오래된 목소리를  특별하게 들어준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마저 든다.


2015년 10월 15일



비 오는 날


비가 내려 포도나무는 이파리를 넓히고 있다.

여름의 포도를 상상해본다.

비가 오는 날엔  비를 본다.

비에 젖는 버드나무를 한참 바라본다.

비 오는 날 나무에겐 비 말고 다른 무엇도 의미 없어 보인다.

엄마도 비 오는 날 포도를 심었다.

엄마는 포도를 심어서 나에게 포도색을 알게 했다.


2019년 5월 19일



흰 나비를 본 날


흰나비가 가끔 날아왔다. 사철나무가 꽃피우고 포도알이 굵어지고 있다.

버드나무 한 그루가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껴지게 한다.

버드나무는 한겨울 빼고 거의 푸르지만 늘 다른 느낌으로 다른 모습으로 말을 건다.

버드나무가 계절의 큰 변화를 몸으로 알려주지만 미세한 차이는 찾아오는 곤충과 조류들이 알려주기도 한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물음표를 품고 많은 말을 한다. 버드나무는 아무리 키가 커도 고요히 멋스럽게 말하는 나무 같다.

자연은 홀로 있을 때 소리 없이 말하고, 인간은 홀로도 소란스럽게 말한다는데 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20190629 토요일 오전, 블루박스 창가에서


11살 무렵, 엄마는 이사 간  새집  마당 수돗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나는 그때까지  포도를 먹어본 적도 본 적도 없기에 포도가 열리길 무척 기다렸다. 몇 해 지나 포도가 열렸는데 기대한 만큼 알이 굵지도 않았고 사실 맛도 별로였다. 너무 시어 먹을 수도 없는 포도였지만 나는 그래도 그 포도나무가 좋았다. 다른 집에는 없던 포도나무가 있어서 괜히 으쓱했던 것도 같다


세월이 흘러 수돗가에 넓은 그늘이 드리워지던 땐, 엄마가 많이 아팠다.

포도나무가 구불구불 가지를 뻗어 그늘을 넓힐수록 엄마의 주름살도 늘어갔다. 포도가 열렸지만 포도를 따 먹지는 않았던 엄마. 시어서였을까 포도송이를 오래 두고 보고 싶어서였을까. 어쩌면 엄마의 성격상 나는 후자일 거란 생각이 든다. 물어보지 않아도 지금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 나니 점점 엄마를 닮아간다. 내가 땅이 생긴다면 분명 나도 포도나무를 심을 것이다.  신 포도가 열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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