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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Feb 10. 2023

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

만나부엌에서 등심 가스를 먹였다

 만나부엌에서 등심 가스를 먹었다.

 만나부엌은 등심 가스 전문점이다.


  오후 3시, 나는 이곳을 지나다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뭔가에 이끌리듯 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내 안의 또다른 내가 물리적 허기는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두 발은 이미 식당에 들어간 상태였다. 아침을 11시에 먹었으니 이제 배가 고플 때도 되었다고 합리화를 해봤지만 역시 배가 고픈 건 아니다.

  창가에 앉았다. 음식이 막 나오려는데 4인 가족이 들어온다. 여고생 정도로 보이는 딸과 중학생 정도 되는 아들을 데리고 들어온 부모, 아이들의 엄마가 내 건너 옆자리에 앉아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키오스크로 간다.

"우리 딸? 뭐 먹을래?"

"등심가스~~~~!" 딸은 부리에 기름칠을 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혀를 굴려 말한다. 엄마는 커다란 전기밥솥에서 접시가 넘치도록 수프를 담아 딸아이 앞에 밀어 놓는다.

익숙한 모습이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언제나 했던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내가 혼자 와서 등심가스를 시켜놓고 앉아보니 그 광경이 왠지 낯설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이어서 그런가. 나는 잠시 후 나온 등심가스가 아닌 내 마음에 집중을 해 보았다.

'아... 등심가스를 주문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오십의 내가 아니다. 이 등심가스를 먹는 나는 저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과거의 나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지 않다. 나는 십 대의 허기진 나에게 밥을 먹이는구나.' 내 감정을 알아차리림과 동시에 갑자기 목이 메어 왔다.  '케엑' 입에서 채 넘기지 않은 음식을 물고 숨을 몰아쉬며 물을 찾는다. 사레가 들렸다. 그제야 내 앞에 물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종업원이 '물도 안 드렸네' 하며 물을 식탁에 가져다주었다.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유학을 가는 친구들의 분위기에 맞춰 마치 나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 생각을 한 것인지, 시골을 떠나면 공부를 더 잘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이 들었던 건지 암튼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따라 유학을 결심했다. 그렇게 무작정 떠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을 우겨 춘천으로 유학을 갔다.

  3년간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3년은 공부를 위한 시기보다는 그냥 오기로 버텼던 것 같다.

'힘들다고 돌아오려거든 애초에 나가지 마라. 돈이 없으니 무조건 자취를 해라. 기본 식비 외 일절 지원이 어렵다.' 아버지의 이 세 마디에 그러고마, 약속을 하고 나는 옷가지와 책 몇 권만 챙겨 춘천에 갔다. 언덕 꼭대기에 아주 초라한 자취방을 얻었다. 춘천에 살던 고모가 얻어줬는데 도무지 나를 생각한 자취방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이었다. 그때 나는 고모에게 실망했다. 고모의 딸이라면 이런 자취방을 얻어줬을까, 고모의 친조카라면 이런 방을 얻어줬을까... 창호지를 바른 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 나오고, 부엌은 지붕만 있고 문이라야 있으나마나한 그런 한 평도 안 되는 부엌, 방 창문은 남고 아이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는 그런 방 말이다. 당시 그 방은 3만 5천원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두 달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기간 자취를 했다. 당시 야간 자율학습 시간 전 저녁 시간이 되면 따스한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갖은 반찬을 펼쳐놓고 친구들끼리 나눠 먹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나는 변변한 도시락 반찬이 없어 저녁 도시락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당시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가곤 했는데 집에서 반찬을 가져올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점심 도시락이야 어쩔 수 없어 대충 싸갔지만 저녁까지 같은 반찬으로 도시락을 준비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저녁 야자 시간엔 늘 자취방에 뛰어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식은 밥이 있으면 그걸 콩나물국이나 대충 끓인 된장국에 말아먹기도 했다. 밥이 없으면 가게에서 빵이나 초코파이를 사가 때우기도 하고, 김을 식은 밥에 싸서 꾸역꾸역 먹기도 했다.


  어느 날, 밥을 먹으러 나가는데 저녁 도시락을 건네주는 짝꿍의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돈가스니까 많이 먹어. 맛있게 먹고 공부 열심히 해" 그러자, 그 아이는 입이 활짝 벌어지며 보온도시락을 받아 들고 사뿐사뿐 교실로 뛰어갔다. 나는 그때 공부 잘하고 얼굴도 뽀얀 그 애가 맛난 밥을 먹어서 잘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냥 그런 아이들과는 가깝게 지내는 게 왠지 불편했다. 그렇게 보온 도시락을 들고 기다리는 급우들의 어머니는 꽤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하거나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예쁜 옷을 입고, 좋은 가방에 좋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한 번은 짝이  무작정 나를 따라왔던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가 집에 가서 대단한 반찬과 먹는 줄 알았던 건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에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건지 외출증도 없이 내 뒤를 밟아 내 자취방에 온 것이다.

  그날 짝꿍은 라면 하나 더 끓여줄 형편이 못 된다는 내 형편을 단번에 알아차린 후 다시는 내 자취방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 매점에 가서 뭘 사 먹자는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이후 사이도 좀 서먹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히 부모의 경제력과 우등생은 비례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형편의 시골에서 온 몇 안 되는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다.


  자아의 근거가 되는 기억의 힘은 집요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어떤 단어나 장면으로 인해 갑자기 과거가 끊임없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그 과거의 어떤 시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혼자는 한 번도 사 먹은 적 없는 등심가스를 나는 그날 어쩌다 먹게 되었을까를 지금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날 아침 아이의 수능을 앞두고 보온 도시락을 주문했다. 보온도시락에 싼 밥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그날 좋은 보온도시락을 주문하며 수능날엔 아이가 원하는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주리라 다짐했다. 그날 오후 식당 앞을 지나게 된 것이고, 갑자기 나의 고등학생 시절의 도시락이 떠오른 것 같다.


그날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번도 나를 찾아와 보지 못한 어머니와 맛있는 돈가스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십 대의 정서적으로 허기진 나에게 따스한 밥 한 끼를 사주고 싶었던 걸지 모른다.


내가 아이들을 양육하며 그때의 부모님과 같은 시기를 겪고 나니 그 시절 부모님을 이해 못 할 게 없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시절, 유학을 간다고 설쳐댔으니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선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그때의 서운했던 나도 모자란 을 내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도 지금은 그저 안쓰럽다. 그리고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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