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어떻게 삶을 사랑하게 하나?

쪽동백나무 향기에 취한 장흥수목원에서

by 붉나무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진향 꽃향기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장흥수목원은 산 중턱에 있었고, 매표소 포함 건물은 오래돼 낡아보였다.

지난 번 제이드 가든처럼 산뜻하고 근사하진 않았지만, 꽃향기기 취해 나는 표를 끊기도 전에 입구에 핀 꽃들을 둘러보았다.

흔한 금잔화, 카네이션 등을 화분에 심어놓았고, 매표소 바로 안쪽엔 작은 상점과 분재 전시도 마련돼 있었다.

화분에 심어진 꽃들이 자생수목원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마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한 듯했다.

쪽동백나무

입구에는 백당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나는 향기에 이끌려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나무는 쪽동백나무였다.

데크 옆으로 하얗게 핀 꽃들이 길을 안내하듯 이어졌고, 향기가 어찌나 진한지 이 꽃이 주인공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식물이름표를 보고서야 그것이 쪽동백나무임을 알았고, 꽃이 때죽나무와 닮아 검색해보니 역시나 때죽나무과였다.

쪽동백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듯했고, 아름드리 나무부터 어린 나무까지 다양하게 오솔길을 따라 분포해 있었다. 꽃은 작지만 향기롭고, 잎은 넓어 햇빛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잎이 마치 지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쪽동백나무가 자라는 자생식물원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또 다른 흰꽃의 주인공은 입구 쪽에 우뚝 선 아름드리 층층나무였다. 그렇게 큰 층층나무를 본 것도, 꽃 핀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라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당에 층층나무를 심었는데데, 해마다 한 층씩 층을 높이며 자라서 층층나무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나무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에 가면 그 나무의 층을 세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나무는 언젠가 팬션 방문객들이 묶는 텐트 고정줄이나 빨랫줄로 시름을 앓다 죽은 걸로 기억한다.

매발톱꽃
만병초
백당나무
국수나무
층층나무

100년 이상 된 잣나무, 낙엽송, 전나무들 사이로 다양한 관목과 식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오솔길 외에는 빈틈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수목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인위적인 손길을 최소화한 채 숲 본연의 모습으로 두려 한 듯했다.

곳곳에는 쉴 수 있는 정자도 마련돼 있어 숲속에서 온전히 머물고 쉬었다 가기를 권하는 듯했다. 또 요즘 식물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나비들도 많이 날아다녔다.

걷는 내내 청아한 새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음속에 쌓인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둘레길 위로는 1.5km 길이의 치유숲길도 있었고, 등산화를 신고 왔다면 산행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다.


장흥수목원은 온실이나 외부 시설은 다소 노후되어 있었지만, 숲의 내실만큼은 풍부한 곳이었다.


숲과 숲이 아닌 곳의 온도와 습도는 확연히 다르다. 특히 요즘처럼 날씨 변화가 심한 시기엔 그 차이가 더 두드러진다. 숲에 들어서면 꽃에서 퍼지는 향기, 새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로 지저귀는 소리,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까지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행복감에 젖어든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사소한 일들 속에서 작은 기쁨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면, 그런 기쁨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반면, 숲에 들어오면 그런 감각들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난다. 해야 할 일들, 익숙한 환경에서 잠시 벗어나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쁨의 원천, 자연.

나는 산골에서 자라 자연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오랜 기간의 산책과 사진 촬영을 통해 시선이 트이고 마음이 깊어지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단순히 대상을 담는 일이 아니다. 날씨의 변화, 빛과 그림자의 변주, 식물의 생장, 동물의 움직임, 구름의 흐름, 공기의 무게, 새들의 지저귐, 바람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의 제스처까지 민감하게 포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내 감정과 생각은 그때만큼은 섬세하고 오묘하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고유한 기쁨이다.


산책하며 느꼈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보려는 시도는 단지 기억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 변화는 금방 드러나지 않지만, 몇 해가 흐른 뒤에는 분명 달라진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내 삶이 내 뜻대로 가지 않더라도 더욱 꼭 끌아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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