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당했다. 여행 사기.
아내는 효부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아마 동네에 효부비가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얼마나 살뜰히 챙기는지, 본가에서 살 때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 다녀오자고 노래를 불렀다. 때마다 부모님 모시고 외식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아니 시월드에 사는 게 곤욕일 텐데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려고만 하다니... 난 불효자라서 아내의 말에 한사코 거부했다. 돈이 없어서 안 된다고만 했다.
아내는 나의 반대에 늘 아쉬워했다. 부모님이 얼마나 더 사실지도 모르는데 두 분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꼭 가야 한다고 우겼다. 오래 사시더라도 더 나이 드시면 몸이 힘드셔서 그때는 갈 형편이 돼도 함께 못 간다며, 조금이라도 체력이 되실 때 두 분을 모시고 해외여행 한 번 가자고 자꾸만 졸랐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내의 마음에 속으로 감동하여 못 이긴 척 그러자 했다.
마침 아내가 꼭 구입해야만 하는 여행 상품을 발견했다. 비용이 ‘지나치게’ 저렴했으니까. 비용이 저렴한 데다 숙박 시설과 관광 상품까지 매우 훌륭했으니 구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없을 기회였다.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기회였다. 저렴하게 해외여행도 하고, 효도도 하고.
마치 아울렛 백화점에서 제발 가져가 달라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는 옷들처럼, 그 여행 상품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망울에 못 이겨 덜컥 구입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무 문제없었다. 돈을 입금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상품은 사실 우리가 찾은 게 아니다. 아내 지인이 권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지인이 일하던 여행사에서 알게 된 한국인 해외 가이드가 급히 소진해야 할 여행 상품 판매를 지인에게 부탁했다. 여행사들은 가끔 항공 티켓과 현지 숙박 시설을 대량으로, 저렴하게 예약한다고 한다. 대신 정해진 수량을 기간 내에 다 판매하지 못하면 판매하지 못한 수량은 페널티를 받게 된다고 한다. 그 페널티 금액이 꽤 크다고. 페널티를 받는 것보다 싸게라도 판매하는 게 손해가 적어서 손해를 감수하고 정상가보다 싸게 급매 처분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그런 상품을 권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가격이 저렴 너무 저렴하니 의심할 수밖에. 구린내가 심하게 진동해서 그 가이드에 대해 구글링을 해봤다. 웬 인터넷 카페가 검색됐다. 그 가이드가 운영하는 카페인데 여행객들 후기가 좋았다. 그것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다. 그리고 지인을 믿을만했고, 지인이 그런 경우가 실제로 왕왕 있다고 하니 그 말을 믿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는 그 가이드와 협업하는 국내 여행사를 통해 작성했다. 실제 계약서가 오가지는 않았고, 파일로만 확인하고 서명했다. 이때까지도 의심이 다 풀리지는 않았다. 계약 방식이 이상하긴 했지만, 여행사가 중간에 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게다가 지인까지 계약을 했다니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만 계약했으면 좋았을 텐데, 욕심을 너무 과하게 부렸나 보다.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우리만 다녀오기 아까웠다. 여행지는 필리핀 섬들 중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경치가 속된 말로 죽여줬다. 숙박 시설은 풀 빌라에, 여행 내내 삼시 세끼 제공.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게 저렴했자만, 어쨌든 마다 할 이유가 없는 상품이었다. 좋은 의도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기당했다. 가이드에게 e티켓을 보내 달라고 하니 티켓 발송을 차일피일 미뤘다. 왜 안 보내주냐고 하니 항공사에서 아직 승인이 안 됐다나 뭐라나. 말도 안 되는 핑계였고, 이때부터 다시 구린내가 났지만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지인도 받지 못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기다려 보자 했으니 좀 더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티켓을 보내주지 않았다. 자꾸 재촉하니 겨우 보내준 게 예약번호였다. 그 번호로 조회를 해봤는데 티켓료가 입금이 되지 않아서 발권 대기 중이었다. 여행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발권이 언제 가능하냐고 물으니 얼버무리기만 했다. 안 좋은 촉이 와서 급히 다시 구글링해 보았다. 웬걸! 전에 찾아봤을 때는 분명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와 관련된 사기 사건이 무더기로 검색됐다. 어떤 사람은 고소까지 했단다. 아뿔싸. 우리는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도대체 왜, 처음 검색했을 때는 전혀 검색되지 않다가 이제야 검색이 된 것일까! 같은 검색어로 검색했는 데도 말이다. 정말 이상했다. 그가 운영하던 카페는 위장 카페였다. 우리와 같은 피해자를 속이기 위한 카페였다. 카페에 올라온 후기들까지 거짓은 아니었다. 그에게 실제로 가이드를 받은 여행객들이 남긴 후기였다. 다만 예전 후기였을 뿐이다.
이렇게 당하다니... 내 아내가 어떤 사람인데. 꼼꼼하고 확실한 사람인데 이렇게 당하다니. 참으로 허망했다. 아내 탓을 하지는 않았다. 나도 함께 알아보고, 함께 결정했으니까. 아무리 꼼꼼해도 당하려면 당하는 게 사기이니 마음이 쓰렸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하려다가 덤터기를 썼다. 우리는 무려 수백 만원을 사람들에게 물어줘야 했다. 그동안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피 같은 돈을 쏟아부었다. 우리도 피해잔데 어떤 사람은 한 패 아니냐며 우리를 고소하겠다고 했다. 기가 막히고, 정말 서운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도 같은 심정이니까. 우리가 소개해 주었으니 우리에게 뭐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우리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결정은 본인들이 한 거 아닌가? 못 믿을 만하면 구매하지 말라고 소개할 때 분명히 말했건만, 이제 와서 우리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니. 본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인데 말이다. 사기꾼뿐만 아니라, 우리를 원망하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어쩌랴. 어쨌든 우리 때문에 피해 입은 건 사실이니. 돈을 탈탈 털어서 모두 배상해 주었다. 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전부 물어주었다. 금전적 피해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피해도 컸다. 좋은 일 하려다가 무슨 난리인가. 부모님에게는 뭐라 말씀드려야 할까. 효도하려다 벌어진 일이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미안해하실까 봐 거짓말했다. 가이드가 취소했다고. 대신 다른 데로 여행 보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몇 달 후, 약속대로 여름휴가 시즌에 맞춰 두 분만 해외여행을 보내드렸다. 사기 피해로 금전적인 여력이 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께는 휴가를 못 냈다고만 말씀드렸다.
알고 보니 그 사기꾼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서울에 있는 그의 부인도 찾아가 보고, 남도에 사는 어머니도 찾아가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도 당했다. 부인은 한패인 듯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수 년이 지났지만, 그 녀석은 아직도 사기를 치고 다닐지도 모른다. 피해 금액이 수억이 될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많지만, 다들 소액이라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본 후에 피해자들을 여럿 모아 각자 고소하는 걸로 대응했지만, 해외에 있어서 검찰은 출국 금지만 할 뿐이었다. 한국에 들어오지 않으니 출국 금지는 하나 마나였다.
아내는 사람들을 챙기는 걸 좋아한다. 그럴 형편이 안 되는 데도 맛있는 게 있으면 대량으로 사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좋은 게 있으면 절대 혼자 누리지 않고 항상 지인들에게 소개해 주고, 함께 즐긴다. 그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늘 다른 사람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인데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을 받았다. 물질적 피해는, 우리에게는 큰 금액이지만 돈은 다시 모으면 된다. 하지만 정신적 피해는 돌이키기 힘들다. 아내가 그 일을 잊을 수 있게 다독였다. 나도 화가 났지만 아내가 더 화날 테니, 잊으라고 연신 위로했다. 그 일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아내를 안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아내는 또다시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잔다. 내년에 아버지가 칠순이시니, 우리가 물질적으로 여유로워진 후에 모시고 가려면 체력이 안 돼서 못 가신다고, 전과 같은 말을 한다. 몇 년 전 그 말을 할 때는 맞벌이 중이었음에도 여력이 안 됐다. 지금은 아이가 태어나서 외벌이 중이라 그때보다 더 여유가 없다. 정말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하지만 아내는 카드 빚을 져서라도 모시고 가잔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고, 고작 몇 백 못 갚겠냐며 말이다. 아내 말은 들어서 나쁠 거 없다. 내년에 맞벌이를 하겠다고 하니, 그렇게 말해주는 아내가 눈물 나게 고맙다. 이 못난 불효자를 효자로 만들어 주는 아내는 정말 효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