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짓는남자 Nov 18. 2019

말을 걸어 주면 대답은 잘합니다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15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 나는 어쩌고저쩌고 쏼라쏼라~”

나를 잘 아는 지인이라면, 모임 중에 내게 꼭 질문을 해준다. 질문하지 않으면 모임이 마무리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거라는 걸 잘 아니까. 반대로, 질문을 하면 술술 얘기할 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틈틈이 질문을 해서 내 말문을 트여 준다.

내향인인 나는 어떤 모임에서든 말을 잘하지 않는다. 말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고 별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나 스스로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말을 전혀 안 한 줄 착각한다. 따지고 보면 전혀 안 한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한두 마디라도 했으니 어쨌든 말을 하긴 한 거다.

나는 스스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말을 걸어 주면 잘한다. 질문을 해주거나 화두를 던져 주면 좔좔좔 잘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묻는다.

“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왜 말을 안 해?”

나는 그저 짧게 대답한다.

“그냥.”

“그냥”이라는 대답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내 기질에 대한 설명과 기질로 인한 심리, 육체 상태 등 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그 한 마디 안에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저렇게 대답하고 만다. 물었으니 내 대답을 듣기는 하겠지만, 나의 성향을 이해 해주진 않을 테니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관심을 지우기 위해 재빨리 얼렁뚱땅 넘어간다.


때론  “그냥”이라는 대답 말고, 일부러 동문서답을 하기도 한다. 그 순간 나에게 쏠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 말이다. 실제로 엉뚱한 대답을 하면 나에게 쏠린 사람들의 관심은 즉시 다른 데로 이동한다. 대신 부작용이 생긴다. 사람들은 ‘무슨 대답이 그래’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말귀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람들의 관심을 끊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내향인은 모임이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웬만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화에 좀처럼 끼어들지 않는다.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대화 내용을 분석하느라 끼어들 틈이 없다. 분석하기도 바쁘고, 분석이 끝나서 마침내 할 말이 생기면 대화 주제는 진작 바뀌어서 떠오른 말을 폐기해야 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일은 피곤하다. 대화에 끼어들려면 할 말을 생각해야 한다. 할 말을 생각해내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두뇌를 회전시켜야 하니까. 머리를 굴리면 에너지가 소모되니 피로가 쌓인다. 이뿐만 아니다.


에너지 소모를 감수하고 할 말을 떠올렸다 치자. 할 말을 방출하려면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도중에 끊고 내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매너 없는 행동이다. 사람들이 실컷 대화하다가 잠시 침묵이 감돌 때 던지면 좋은데, 이때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

재빠르게 행동해서 말을 던질 기회를 잡았어도 맥락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침묵이 길어지면 전혀 다른 내용의 말을 해도 되지만, 침묵이 짧다면 가능한 한 이전에 나누던 대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들이 ‘뭐지?’라고 생각한다. 맥락과 상관없는 말을 할 거면 왜 그 말을 했는지 부연 설명을 해야 한다.


이처럼 대화에 끼어들려고 할 때 수반되는 행동이나 고려해야 할 점들은 내향인에게 피로를 안겨 준다. 그러니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잠잠할 수밖에. 외향인이 보기에 별 걸 다 피곤해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기질이 그러니까.

이런 이유들 때문에(또 다른 이유도 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면 글이 길어지니 그건 생략) 내향인은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소극적으로 말을 한다. 즉 말을 걸면 대답은 잘한다. 물론 컨디션이나 상황에 따라 대답을 잘 못하거나 피할 때도 있지만, 웬만해서 묻는 말에는 대답을 잘한다.

내향인이 질문에 대답을 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답마저 안 하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까지는 사람들이 그러려니 해주곤 하지만, 묻는 말에까지 대답을 안 하면 더 이상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사람들의 질문은 내향인을 이해해주는 마지노선이다. 그 선을 넘어가면 정말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다. 그러니 대답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억지로 대답하게 되고, 때론 최대한 성의 있게 또 때론 상황을 봐서 대충 대답하기도 한다.




어제도 몇몇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아니 사람들은 서로 왁자지껄 대화를 나눴고, 나는 ‘하하, 호호’ 화려한 리액션을 펼쳤다. 사람들이 웃을 때 함께 웃고, 사람들의 말에 수긍이 될 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 내용이 좋고, 공감이 돼서 나도 모르게 연신 리액션의 향연을 벌였다. 하지만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두 시간 동안 딱 세 번 말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한 게 아니다.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해서 대답한 것이다. 단답형으로 말하면 자칫 물어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어서 길게, 세 질문에 문단형으로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고 자찬하며.

오해는 마시길. 늘 이런 건 아니다. 항상 말을 안 하는 건 아니다. 편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나도 실컷 말한다. 누군가 내게 질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대화에 잘도 끼어든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실컷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컷은 장도가 다르지만, 내 기준에서의 실컷은 적어도 사람들이 내가 벙어리라고 느끼지 않을 정도는 된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안 할 정도는 된다.

‘쟤는 왜 한 마디도 안 해.’
‘쟤는 왜 말도 안 하고, 저러고 있어.’

아무리 내향인이라도 편한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잘한다. 편한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라는 염려는 저 멀리 걷어 차 버린다. ‘괜히 이 말을 했나’, ‘내 말에 기분 나빴을까’라며 눈치 보지 않는다. 머릿속에 할 말이 떠오르는 족족 내뱉는다. 왜, 편한 사람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받아주니까. 어떤 말을 하든 이해해 주니까. 편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벙어리가 되고 질문할 때만 말을 하지만, 편한 사람들을 만나면 내향인인 나도 수다쟁이가 된다.




편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나도 실컷 말한다. 누군가 내게 질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대화에 잘도 끼어든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실컷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컷은 장도가 다르지만, 내 기준에서의 실컷은 적어도 사람들이 내가 벙어리라고 느끼지 않을 정도는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