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짓는남자 Nov 26. 2019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18

‘힐끔’

앞서 가던 동료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힐끔’

아까 나를 봤던 그가 얼마 후에 다시 나를 쳐다본다. 반복해서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속으로 말한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계속 가세요.’

내 속 마음을 읽었을까? 그가 내게 말한다.

“혼자 걷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걸어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데... 길이 좁아서 따로 걸었던 것뿐이다. 나는 마주 오는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려고 뒤에서 걸었다. 셋이 나란히 걸으면 앞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 양끝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은 몸을 틀어 앞사람이 빠져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거나 앞이나 뒤로 빠져서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굳이 한 명이 수고해야 한다. 애초에 내가 뒤에서 걸으면 아무도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동료가 이 마음은 읽지 못했는지, 다른 사람은 배려하지 않고 나만 배려해준다.

다른 마음도 있었다. 공간을 만들어 주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쓰지 않아도 될 에너지를 둘 중 한 명은 소비해야 한다. 아마 그 사람은 내가 될 것이다. 반대쪽에 있는 동료가 움직이는 수고를 하게 하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 듯 느껴져서 그가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고, 신경을 씀으로써 발생하는 에너지 소모를 피하고 싶었다.

또한 함께 걸으면 나도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별로 대화하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일대일 상황이면 몰라도 여러 명이 걸으면서 대화하면 부산하다. 주변 소음에 대화 소리가 묻히니 더 신경 써서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 있는 장애물을 피하는라 정신이 분산돼서 대화에 집중이 잘 안 된다. 그만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는 말이다. 에너지를 소비한 만큼 피로가 쌓인다. 피곤해지기 싫어서 혼자 떨어져 걸었다. 정리하면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 피로 때문에 혼자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혼자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오라” 하는데 “싫어요” 할 수 없으니 억지로 곁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셋이 나란히 걸었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비켜주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나에게 “오라”고 말한 동료가 나의 마음을 알고 나면 “참 독특한 사람이네” 하고 말할지 모르겠다. 혹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인정한다. 내 생각과 행동이 독특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나는 내 자신이 독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성향이 그런 것뿐이니까. 일부러 독특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정말 독특한 거겠지만, 내 기질이 그래서 그런 거니 나는 전혀 독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기질을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모두 같아야 한다는, 사람의 기질을 획일화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한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모든 사람은 똑같을 수 없다. 생각이 다르고, 타고난 기질이 다르니까.

눈, 코, 입이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 마저 생각과 습관이 다른데,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며, 심지어 기질이 다른 너와 내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후천적 환경, 공산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조차도 다르다. 어릴 적부터 똑같은 사상을 주입받고, 행동을 통제받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조차도 생각과 행동이 100% 똑같이 발현되지 않는다.

그런데 너와 내가 뚜렷이 구별되는 각각의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겠냔 말이다. 똑같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행동을 하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틀리다’고 규정한다. ‘다름’‘틀림’은 분명히 다르다. 그 둘을 구분 못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물론 ‘다른’ 게 아니라 ‘틀리다’고 규정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이 있다. 특정 범주의 사고나 행동은 분명 ‘틀리다’고 규정할 수 있다. 시대나 사회마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옳다, 그르다’ 혹은 ‘맞다, 틀리다’고 사람들이 공통으로 합의하고, 동의하는 사고나 행동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내 행동은 그저 생각과 방식이 다른 것뿐이지 틀린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향인과 외향인의 기질적 차이를 다른 게 아니라 틀리다고 규정한 채 내향인의 행동들을 ‘저 사람 왜 저래’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시선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말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사교 모임(?)에 참석하면 꼭 나를 챙겨 주는 사람이 있다. 좋게 말하면 신경 써줘서 고맙고, 나쁘게 말하면 괜한 오지랖 좀 부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신경 쓰는 내향인이라 보통은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따금, 내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나를 과도하게 신경 쓰면 ‘저 오지랖, 제발 좀 그만 신경 쓰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거부감을 갖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튀는 행동을 하지 말던가!”

내 행동이 그리 튀던가? 내향인들끼리 모이면 내 행동은 전혀 튀지 않는다. 다 비슷한 행동을 하거나 서로의 기질을 암묵적으로 이해해 주니까. 내 행동은 외향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레이더망에 꼭 걸린다. 외향인과 내향인이 뒤섞여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꼭 외향인만 나를 신경 쓴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외향인 오지랖 떠는 걸로밖에는 안 보인다.

그래도 나는 외향인의 오지랖을 이해한다. 그건 그들만의 예민함이니까. 그들은 자신과 다른 행동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어떻게든 지적하고, 자기 눈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고치려 하니까. 그래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게 외향인의 기질이니 이해해야지. 나마저도 저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틀린’ 걸로 규정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




우리는 누군가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행동을 하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틀리다’고 규정한다. ‘다름’‘틀림’은 분명히 다르다. 그 둘을 구분 못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일할 때 능률이 오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