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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Dec 02. 2019

내가 놀 줄 모른다고요?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20

국민학교(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이다) 4학년 때 반에서 놀 줄 아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부러워 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남녀 무리로 이루어진 그 녀석들은 우선 외모를 잘 꾸몄다. Guess, FILA 등 당시에 유행하던 메이커 옷을 입고 다니며 한껏 멋을 부렸다. 그리고 그네들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 집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동경의 아이템인 소니 워크맨이나 삼성 마이마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마로니에 등의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노래를 듣고 불렀다. 그뿐이랴. 그 나이, 그 시대에 남자 친구 여자 친구가 있었다. 이성 교제를 했다. 지금이야 유치원생들도 이성 친구를 만들지만, 당시에는 주로 노는 애들이나 이성 친구를 사귀었다.

이런 모습들이 참 부러웠다. 더욱이 그들의 넘치는 끼를 보노라면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말도 못 하게 부러웠다.

학예회나 수학여행 때 그들은 흡사 연예인이 되었다. 놀 줄 아는 그 녀석들은 어찌나 끼가 많은지, 학예회와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을 독차지했다. 연극이나 노래, 춤으로 무대를 장악하며 급우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들의 인기를 빼앗고 싶어서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마음뿐이었다. 부러워만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이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나 자신을 원망했다.

국민학교 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잘 노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항상 부러워만 할 뿐, 나는 그 무대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어릴 적에는 나의 내성적인 기질을 탓하기만 했다. 다행히 나를 왜 이런 기질로 낳아 주신 건지, 한 번도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다. 철없는 나이에도 그저 내 기질을 답답해하기만 했다.

나의 기질을 답답해하면서도, 희한하게 바꿔보려는 시도는 한 번도 안 했다. 여느 사람 같으면 달라져 보려고도 했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 기질에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순응할 뿐이었다. 돌아보면 그 조차도 내성적인 기질 때문인 듯하다.

기질이 이런  어떻게 하겠나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받아들였다. 내성적인 기질을 바꿔서 뭐하겠나, 자포자기는 아니고 불가항력적인 아니면 운명적인 부분에 순응한 것 같다. 바꾸려는 의지도 없었고, 바꿔서 뭐 하나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내 기질에 대한 불만은 답답한 마음이 잦아들면서 함께 씻겨 내려갔다. 씻겨 내려간 후에는 기질에 대한 생각도 사라졌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잘 노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 기질에 젖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지금은 내성적인 기질에 그리 불만을 갖지도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들과 나는 노는 방식이 다른 것뿐이야. 저들은  놀고, 나는  논다고 선을 그을  있는 문제가 아니야. 저들은 저들의 방식, 기질대로 노는 것이고, 나는 나의 기질대로 노는 것뿐이니, 굳이 부러워할 필요 없어. 나는  기질대로 놀면 되는 거야.’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누가 더 잘 놀고, 못 놀고의 기준은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나 동호회 모임에서 앞으로 뛰쳐나가 목청껏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잘 노는 것이고, 자리에 앉아서 웃으며 박수만 치면 못 노는 것일까? 아니, 그저 노는 방식이 다른 것뿐이다.


외향인은 앞으로 나가야 흥을 더 많이 느끼고, 내향인은 자리 앉아 박수만 쳐도 흥을 양껏 느낀다. 물론 내향인은 기질 때문에 앞에 나가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쑥스럽고, 사람들의 주목받는 게 부담스러우니까. 내향인이 앞에 나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기질 때문이지만, 그래도 노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 기질이 어쨌든 자기 방식으로 잘 논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앞으로 나오고, 노래방에서는 마이크를 들어 노래를 불러야 잘 노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나도 놀 줄 안다. 나도 잘 논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모임이나 야유회에서 혼자 앞에 서서 장기자랑을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한다. 원치 않게 불려 나가면, 분위기가 깨지더라도 손사래를 치며 내려온다.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그러게  불러냈어? 나가기 싫다고 말했잖아! 불러내지 않았으면 분위기 깨질 일도 없는데  억지로 불러내서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노래방에서 사람들이 왜 노래 안 하냐고 손에 억지로 마이크를 쥐어 주면, 노래를 못한다고 아니면 ‘가요를 듣지 않아서 아는 노래가 없다고 혹은 옛날 노래와 발라드밖에 몰라서 내가 노래 부르면 흥겨운 분위기가 깨진다고 말하며 마이크를 내려놓는다. 그래도 다시 손에 마이크를 쥐어 주면 마지못해 한 곡 부른다. 애절한 발라드를. 그러면 다시는 시키지 않는다(거 봐. 분위기 깨진다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놀지는 않지만, 나만의 방식으로는 잘 논다. 누군가 앞에 나가 장기자랑을 하면 힘껏 환호해주고, 노래를 부르면 열심히 탬버린을 흔들어 준다. 말하자면 내가 노는 방식은 리액션이지 ‘주도적인 액션이 아니다.

사람들은 주도적으로 액션을 취해야만 잘 노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마다 노는 방식은 다르다고 말이다.

이렇게 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노는 사람이 있는 거다. 다시 말해서 외향인은 에너지를 분출하며 놀고, 내향인은 에너지를 응축하며 논다. 외향인은 발신, 내향인은 수렴, 각자 논 방식이 다르다. 물론 외향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앞으로 뛰쳐나가는 건 아니고, 내향인이라고 해서 앉아만 있는 건 아니다. 어쨌든 간에 각자 방식대로 놀 때 흥겹게 놀 수 있다. 외향인에게 ‘나대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박수만 치고 놀라고 해보자. 좀이 쑤셔서 제대로 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내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놀건 신경 쓰지 말자. 외향인은 내향인에게 ‘도대체 바보 같이  저렇게   모를까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내향인은 외향인에게 ‘ 저렇게 꼴 보기 싫게 자꾸 나대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 나만 내 방식대로 신나게 놀면 된다. 그러면 모두가 어우러져 재밌게 놀 수 있다.




이렇게 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노는 사람이 있는 거다. 각자 방식대로 놀 때 흥겹게 놀 수 있다. 외향인에게 ‘나대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박수만 치고 놀라’고 해보자. 좀이 쑤셔서 제대로 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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