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회사에서 왕따당하고 있다. 여직원들한테. 정확히 말하면 ‘은따’이다.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은따를 당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아, 은따를 당할 만한 사건이 한 가지 있긴 하다. 그들이 왕따시키던 직원을 챙겼다. 그 직원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를 챙기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던 걸 보면, 분명히 그 일로 그들의 눈 밖에 난 모양이다.
애당초 언젠가 은따를 당하리라 예상하긴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여초 회사기 때문이다. 그게 어쨌냐고? 여성들의 특징이 그렇잖은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면 친하지도 않은데 엄청 친한 척하고, 필요 없어지면 누가 봐도 친한 사이 같았는데 매몰차게 멀리하는. 그뿐인가. 도움이 필요하면 온갖 애교를 부리고 연약한 척해서 도움을 얻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딱 잘라 거절하는. 여성들의 특성은 참으로 독특하고, 여성들의 세계는 냉혹하다. 그런 여성들의 틈바구니에 있으니 은따를 당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에게는 계륵 같은 존재인 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달게 느껴질 때는 삼키고 쓰게 느껴질 때는 뱉으면 그만인 존재다. 그러니 시간문제일 뿐, 은따는 당연히 벌어질 일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여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거의 다 마칠 때쯤 한 직원이 회사 근처에 커피 맛이 좋은 카페를 안다며 다같이 가잔다. 나까지 다섯 명이 식사를 했는데, 그 직원이 ‘넷이서’ 버스보다 택시 타고 가는 게 더 싸다며 그렇게 가잔다. 넷이라니? 나는?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도 투명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식당을 나와서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카페에 갔다. 은따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왕따를 시켰다. 어이없고 화도 났지만 그러려니 했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왕따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건 1990년대 후반이다. 일본의 ‘이지메’가 수입되어 우리 학교 사회에 퍼지면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엄마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렸고, 많은 학생이 고통당했다. 이후 왕따는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피해자를 양산했다. 이제 왕따는 학교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벌어진다. 직장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왕따는 당한 사람 잘못으로 인식되곤 한다. 기업 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혼자 너무 튀는 등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기 일쑤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다. 적응하지 못하면 적응하게 돕고, 튀는 게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업문화는 경직된 경우가 많다. 유연성이 떨어진다. 피해자를 포근하게 감싸주지 않고 도리어 매몰차게 밀어낸다.
더욱 큰 문제는 기업에서 왕따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희롱 문제와 같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도 않은 문제일뿐더러 공론화하기도 애매한 문제다. 또한 조직의 분위기와 문화를 해칠 수도 있는 문제라 웬만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몰라라 한다. 이 문제는 피해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일요일 밤만 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월요병에 은따 때문이다. 월요병이야 많은 직장인이 겪는 병이니 그렇다 치고, 은따는 어쩔 도리가 없는 문제라 월요병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내 마음을 고쳐먹으면 된다. ‘헤헤’거리며 여직원들과 어울리면 된다. 그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잘못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문제를 직접 해결하나. 그냥 투명 인간으로 살자. 그게 낫다. 내가 먼저 저들의 비위를 맞춰봤자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잠깐 나아진 듯 보일 뿐, 나는 다시 은따를 당할 것이다. 그러니 속 없는 사람처럼, 내가 저들을 따돌리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