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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Apr 01. 2019

33년간 모태솔로의 신혼일기 #18

함 받아라!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아내가 웨딩드레스를 입는 모습을 볼 때도, 예물을 고를 때도, 신혼 방을 꾸밀 때도 결혼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실감이 날까? 결혼식을 해야 실감 날까? 결혼해도 실감이 날까 싶을 정도로 무덤덤했다. 아니 얼떨떨했다.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막상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니 정신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마도 결혼 준비를 수동적으로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내가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나는 그저 거들기만 하다 보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아, 정말 결혼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지점이 있었다. 함을 들이는 날이었다.




드라마에서 함을 들이는 장면을 여러 번 봤는데, 짓궂은 모습만 봐서인지 걱정됐다. 신랑 친구들이 오징어를 뒤집어쓰고 신붓집 앞에서 “함 받아라!” 크게 외치면 신부 친구들이 집 밖으로 나온다. 그럼 함지기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신부 측에서 함을 들이기 위해 봉투를 꺼내어 바닥에 놓는다. 함지기는 그것을 밟고 또다시 들어가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는다. 신부 측은 다시 봉투를 꺼내어 바닥에 놓는다. 함지기는 그것을 밟고 재차 들어가지 않겠다고 뻗댄다. 들어와라 싫다, 연신 씨름한다. 함지기가 너무 심하게 버텨서 급기야 몸싸움까지 일어나고, 고성이 오간다.

이런 장면을 많이 봐서 내가 함을 보낼 때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럼 곤란한데. 형은 함을 혼자 들고 처가에 갔다. 그게 어찌나 부럽던지, 형의 모습을 보며 나도 결혼할 때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과연 나도 형처럼 조용히 함을 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드라마에서처럼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까?

다행히 나도 형처럼 평온하게 함을 들일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장모님이 혼자 가져오라고 하셨다! 걱정 많이 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가 보다.




함을 들고 처가에 갔다. 드라마를 보면 신붓집 앞에서 함지기가 “함 받아라!” 엄청나게 크게 외치던데, 드리마 뿐만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나는, ‘딩동’ 아무 말 없이 벨을 살며시 눌렀다. “어서 와” 장모님의 환영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 어색했다! 어제까지 매일 같이 드나든 집이라 내 집처럼 익숙한데, 이날만큼은 굉장히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보험이나 상품을 소개하기 위해 다른 사람 집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함을 들고 있다는 게 이렇게 큰 차이를 느끼게 할 줄이야! 정말 신기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처가에 들어갔지만 이날은 쭈뼛쭈뼛 들어갔다.

장모님과 아내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아내가 무슨 한복이냐고, 편하게 입고 맞이하자고 했는데 장모님이 그래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한복을 입으셨다. 아내가 한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본다. 새댁처럼 보였다. 이런 면도 있었나? 느낌이 새로웠다. 한복 입은 아내를 보니 벌써 결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 드라마를 보면 그랬다. 이제 막 결혼한 새댁이 시댁에서 살 경우 얼마 동안 한복을 입고 생활했다. 예전에는 실제로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그런 모습이 많이 나왔다. 그런 장면이 떠올라서인지 아내가 결혼한 새댁 같아 보였다. 이제 일주일 후면 결혼식을 하니 곧 새댁이 되겠지만.

함을 바닥에 내려놓자 장모님과 아내가 열어보았다. 처가 식구들은 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내가 첫째라, 결혼식은 처음이니 나만큼이라 어색하고, ‘정말 결혼하는구나’ 그제야 실감 났을지 모르겠다. 나야말로 ‘이제 결혼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지금까지 내가 주도적으로 한 게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거들기만 해서 결혼한다는 사실이 그리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함만큼은 내가 들고 가서 건네 드려서, 유일하게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결혼 절차여서인지 그제야 결혼한다는 기분이 들은 것 같다. 더욱이 정확히 일주일 후에 결혼을 한다. 결혼이 코앞이기도 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이제 결혼한다. 곧 품절남이 된다. 결혼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두근두근 정말 설렌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결혼을 이제 한다! 결혼 못 하면 어쩌나 매우 걱정했는데 나도 결혼한다. 결혼에 의의를 두는 건 아니다. 아내와 결혼한다는 게 중요하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이제 곧 아내가 된다. 여자 친구에서 아내, 그녀를 여보라고 부르면 어떤 느낌일까? 쑥스럽고 어색할까? 무척 설레고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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