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월드에 산다.
결혼하자마자 시월드가 펼쳐졌다. 내가 시월드에서 살자고 한 게 아니다. 그럼 큰일 나지. 아내가 스스로 시월드를 택했다. 이유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이다. 집 살 돈 말이다. 집 살 돈이 아니지. 전세금을 모으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월드를 선택했다. 우리가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부모님 신세를 져야 했다.
굳이 시월드에 살지 않아도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긴 했다. 월셋집을 구하거나 싼 전세를 구하면 분가가 가능했다. 하지만 아내는 월셋집은 극구 반대했다. 월세로 집을 마련하면 매달 월세만큼 돈이 허공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돈이 나가야 한다면 차라리 전세 대출을 받아서 집을 마련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전세 대출을 해도 이자가 허공으로 사라지긴 하지만 최소한 원금은 차곡차곡 쌓여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니까. 월세는 돈을 쓰기만 하고, 전세는 돈을 쓰면서 모으니 전세가 백번 낫다! 월세 외에 돈을 따로 모으면 되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 결혼해 보면 알겠지만, 돈 모으기 그리 쉽지 않다.
물론 결혼하면 결혼 전보다 돈을 빠르게, 많이 모을 수 있긴 하다. 그러니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돈을 모으고 결혼하기보다 웬만하면 결혼해서 모으는 게 낫다. 땡전 한 푼 없는 대도 결혼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 모았으면 더 모으려고 애쓰지 말고 결혼해서 모으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각자 하기 나름이다. 결혼하면 결혼 전보다 더 많이 모을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얼마나 희생하고 포기하냐에 따라 모으는 금액이 달라진다.
아무튼 우리는 부모님 집에서 1~2년 정도 살고 돈을 최대한 모아서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원대한 계획과 함께 시월드가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시월드가 말이다.
시월드. 그까짓 거 별거 있나? 남편의 부모와 함께 사는 건데 뭐가 문제겠나. 남편의 부모는 내 부모나 마찬가지이다. 시부모는 내 부모나 다름없는데 시월드, 시집살이가 어려울 게 있겠는가? 그냥 내 부모처럼 대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건 생각 없는 남편들이나 하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가는 큰일 난다. 특히 아내 앞에서. 그런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말이 뭔가. 그런 생각조차 하면 안 된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시집살이는 쉽지 않다는 걸 남자들도 안다. 아무리 시부모가 잘해주고, 편하게 대해 주더라도 시부모는 시부모다.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 벽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물론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피곤하고 힘들진 않지만 말이다.
시집살이는 군 복무보다 더 힘들다. 그렇다고 군 생활이 쉽다는 말은 나도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나는 군 생활을 정말 편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폐쇄된 군대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이제 곧 아들이 태어나는데, 가능하다면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 군 복무는 그 자체로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군 복무는 끝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역하면 모든 게 끝난다. 비록 18개월(내가 복무할 때는 24개월)의 끝자락이 우주 저 끝처럼 멀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결국 끝에 다다르게 된다.
반면 시집살이는 끝이 없다. 시집살이의 끝은 시부모가 나이 들어 죽기 전까지 오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죽거나. 그렇다고 먼저 죽을 수도 없고, 시부모가 어서 죽길 바랄 수도 없다. 시부모를 잘못 만나면 무한대처럼 느껴지는 그 끝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다. 요즘은 80세까지는 거뜬히 사니 최소 30년은 견뎌야 한다. 군 복무는 비할 바가 아니다. 시집이 멀기라도 하면 그나마 낫다. 집안 행사 때만 시집살이를 하면 되니까. 시집이 가까우면 답이 없다. 수시로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 아, 내가 시집살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시집살이에 대해 더 이상 못 적겠다. 시월드 생활이 어땠는지 남편의 눈으로 바라본 아내의 모습을 통해 신속하게 진술하겠다.
우리의 시월드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이 워낙 좋으셔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내 부모라고 미화하는 게 아니냐고? 아니, 한 치의 거짓이나 꾸밈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정말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이 좋으신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3달 동안 아내는 밤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면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게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는 부엌에서 밤낮없이 뭘 하신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도 그게 일상이었다. 그러니 아내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 게 확실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아내를 나오게 하려고 그러셨는지도 말이다. 어쨌든 내가 아는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기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게 확실했다. 어머니 속은 어땠는지 알 길 없지만.
아내는 며느리이기에 늘 부모님을 신경 썼다. 부모님이 무심결에 하신 말씀에도 의미를 부여해서 받아들였다. 아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맞든 틀리든 아내는 늘 촉각을 곤두세웠고,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해석하기 바빴다.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한 달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위염에 걸렸다. 급성 위염에 걸려 두 번이나 응급실에 갔다.
한 번은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배가 너무 아파서 차를 갓길에 세웠다. 당시에 나는 장롱 면허라 운전을 못 했다. 정신이 혼미했던 아내가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겨우 운전을 해서 근처에 있던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역시나 급성 위염 진단을 받았고, 수액을 맞고 퇴원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아내가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어서 대리기사를 불러서 왔다. 아내에게 참 미안하고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 정도로 아내는 신경을 썼다. 시집살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자 분위기에 적응하고, 부모님 성향을 파악해서 아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점점 줄어들었다. 곤두세우고 있던 신경을 그 후부터 수그러뜨렸다. 아내에게 3개월이 길게 느껴졌겠지만, 적응 기간을 비교적 짧게 보내고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아내의 선택과 노력과 희생으로 우리 부부는 시월드 생활을 순탄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집살이가 고통이겠지만, 아내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별일 아닌 듯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3년을 부모님과 함께했다. 3년 동안 아내는 며느리 노릇을 성실히 했다. 아니 딸이 되어 부모님을 잘 모셨다. 부모님도 아내를 딸처럼 생각하며 함께 잘 지냈다.
분가한 지금도 아내는 부모님을 신경 쓴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다. 며느리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신경을 쓸 뿐이다. 자식의 도리를 하는 것뿐이다. 부모님 집이 멀지 않아, 가끔 부모님 집에 가면 아내가 내게 먼저 자고 가자고 할 정도로 시월드는 우리에게 딴 세상이 아니라, 우리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