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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May 16. 2019

커서 뭐가 될래?

우리는 어릴 적부터 목표 중심으로 산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죽어라 달린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수능 점수를 잘 받아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달린다. 대학교 때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애쓴다. 좋은 회사란 돈 많이 받는 데다. 회사에 취직하면? 거기서 끝이다. 그때부터는 아무런 목표 없이 쳇바퀴 돌아가듯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살아간다.

우리는 목적 없이 달린다. 왜 그렇게 죽어라 달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달리라고 하니까 달린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목표를 이뤄야 할 뿐이다. 학창시절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강요당했다. 나 되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목표를 향해 달리라고 채찍질만 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됐는가? 삶의 의미와 이유 없이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매 학년마다 꿈을 조사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매년 조사했다. 왜 조사했던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무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게 무언지도 모른 상태에서 무조건 적어야 했다. 꿈을 적지 않으면 어디가 모자란 사람이 되는 분위기였으니까. 아이들은 선생님, 운동선수, 군인 등 저마다 꿈을 적었다. 나 때는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선생님 아니면 의사였다. 나도 뭣도 모른 채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정말 의사가 되고 싶었을까? 아니, 그냥 멋있어 보여서 그렇게 적었을 뿐이다. 그때는 아픈 사람을 고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멋있어 보였다. 그 꿈을 꼭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 의사가 되어서 건강히 오래 살게 해드리겠다고 조부모님께 말씀드린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된 지금, 의사는커녕 병원 문턱도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 웬만큼 아파도 참기 때문이다. 참지 못할 만큼 아픈 적도 없을뿐더러, 아파 봐야 고직 감기나 몸살뿐이니 갈 일이 없다.

지금 나는 내 꿈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초등학교 때의 꿈과 말이다. 그때 꾸었던 꿈은 그저 공상이었을 뿐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의 허무맹랑한 꿈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 때 꾸었던 꿈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희망적인 게 있다. 지금 나는 스무 살 때 품었던 꿈을 이루었다. 스무 살 때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하고 있다. 꿈은 아무 때나 꾸면 안 되고, 이룰 수 있을 만한 적당한 나이에 꾸어야 하는 걸까?




혹자는 아이들에게 목표를 정하고 달리게 할 게 아니라, 목적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살기만 하면 꿈을 이룬 후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며 말이다. 혹자가 말한 목표는 꿈을 이루는 것이고, 목적은 꿈을 이룬 후에 무엇을 할지를 가리킨다. 꿈을 이룬 후에 삶이 멈추거나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꿈을 이룬 이후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만, 입시 위주의 삶 혹은 목표 지향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우리가 새겨 들을 말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가 말이다.
 
어릴 적이든 성인이 되어서든 꿈, 목표가 있는 건 좋다. 그것이 삶의 의욕이 되어주니까. 하지만 꿈을 이루는 것만 목표로 삼고 살면 2% 부족하다. 꿈을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가령 내가 어릴 적 꿈대로 의사가 되었다 치자. 꿈을 이루면 그다음부터는 쳇바퀴 도는 삶이 시작된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 더 이상 이룰 게 없으니까. 물론 그 이후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다시 달릴 수 있긴 하지만, 스스로 새 목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았고,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선생님 등 타의에 의한 삶을 살아왔으니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를뿐더러 좋아하는 게 뭔지 찾는 데 서툴다. 자라나는 세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르진 않다. 아이들도 수동적인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무얼 할 때 즐겁니?”, “앞으로 무얼 하고 싶니?”라고 말이다. 표면적이고, 현상적이며 목표 지향적인 질문을 하지 말고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본질적인 것을 지향하며 삶을 살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자신을 알아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를 계발/개발하며 삶을 능동적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성인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고,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취미활동을 하는 거로는 삶이 무료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수동적인 방식에 물들어서 이상한 걸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삶의 방식을 탈피하려면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나는 무얼 할 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이 질문을 시작으로 능동적인 삶을 시작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인생은 짧으니까. 짧은 인생을 이왕이면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게 좋지 않겠는가? 늙어서까지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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