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는 ‘힘들이지 않음(effortlessness)’과 ‘자기를 의식하지 않음(unselfconsciousness)’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 특징 중에서 ‘자기를 의식하지 않음’과 관련해 무위를 들여다보려 한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의식하는 주체인 ‘나’가 있고, 의식의 대상이 되는 ‘자기’가 있다. ‘나’는 의식과 개인적 정체성의 중심지이고, ‘자기’는 본인의 몸이다. 무위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이 둘이 분열된 것처럼 느낀다. 이것이 ‘분열된 자아(split-self)’이다. 영어에는 “I couldn’t make myself get out of bed this morning(오늘 아침에 나는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I had to force myself to be calm(나는 나에게 침착함을 강요했다)” 같은 표현이 있다. 여기에서 ‘I’는 ‘나’이고 ‘myself’는 ‘자기’이다. 이처럼 같은 사람인 내(즉, 자아)가 ‘나’와 ‘자기’라는 두 가지 자아로 분열되어 있다.
분열된 자아의 개념은 영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서술자 ‘나’가 다소 자립적인 ‘자아’와 마주하는 고대중국에서 나온 많은 무위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장자》에 나오는 기(夔)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는 머리는 소와 비슷하고 뿔이 없으며 발이 하나밖에 없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기는 작은 다리 수천 개를 빠르게 움직이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노래기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면서, “나는 한 발로 껑충거리며 다니기 때문에 너를 따라가지 못하겠어. 나는 하나뿐인 다리도 잘 다루지 못하는데, 너는 수천 개의 다리를 혼자서 어떻게 다 다루는 거지?”라고 묻는다. 노래기는 답답해하며 “너는 이해 못 하겠지만, 나는 모든 다리를 부리지는 않아. 네가 갑자기 재채기하듯이 할 뿐이야. 사람이 재채기할 때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을 보면 큰 것은 구슬 같고 작은 것은 안개 같은데, 그것들이 뒤섞여 떨어지는 숫자는 다 셀 수가 없지. 그 많은 물방울이 튀어나오는 걸 그 사람이 미리 계획하고 재채기를 하지 않듯이 나는 지금 나의 천기를 움직이기는 하지만 왜 그런지는 몰라”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노래기가 수천 개의 다리를 자연스럽게 부리는 것은 노래기가 무위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노래기는 ‘나’와 수천 개의 다리라는 ‘자기’가 분열되어 있으며, 그 다리라는 ‘자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보다 더 쉽고 평범한 분열된 자아의 예가 있다. 그것은 ‘걷기’이다. 우리는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걷는다. 우리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관찰하지 않은 채 그냥 걷는다. 사실, 걷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걷게 되면 넘어지기에 딱 좋다. 이러한 의식적 관찰은 심신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걷는 것 자체는 우리가 무위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무언가 의식하는 ‘나’는 내 몸의 동작인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 나와 내 몸이 분열되어 있고, 나는 내 몸을 모르지만,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임을 가져간다. 의식적 마음에서 나오는 아무런 정보 없이도 우리 몸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자전거를 탈 수는 있다. 사실 자전거 타는 방법에 의식적으로 집중하거나 그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 말로 설명하면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실제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능력이 저해되어 넘어질 수도 있다.
최근의 인지과학 연구에서는 나라는 자아는 하나이지만 중요한 기능적 측면에서 두 가지 자아로 나뉜다는 ‘분열된 자아’의 개념을 설명하는 틀을 제공해 준다. 인지과학에서 통용되는 견해는 인간의 사고가 두 가지 체계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뜨거운 인지(hot cognition)이다. 이는 빠르고 자동적이고 힘들이지 않고 대개 무의식적인 것으로, 이른바 ‘몸’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차가운 인지(cold cognition)이다. 이는 느리고 계획적이고 노력이 필요하고 의식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의식적이고 언어적 자아인 ‘마음’이다. 이 두 사고 체계를 무위에 관해 보자면, 무위 상태에 있을 때는 차가운 인지는 뜨거운 인지가 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즉, 마음은 몸이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지 못한다.
직장 동료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집에 와서 물 한 잔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연다. 그 안에서 치즈케이크 한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배는 부른 상태인데도 그 치즈케이크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건강과 체중을 생각하며 먹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때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뜨거운 인지’가 작용하는 것이고,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차가운 인지가’ 작용하는 것이다. 나의 의식적인 차가운 인지는 본능적인 뜨거운 인지를 통제하고자 싸우고 있다. 뜨거운 인지는 내 건강과 체중에 대한 차가운 인지의 걱정이 와닿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뜨거운 인지가 진화상 오래전에 고정되어 확고하게 굳어 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설탕과 지방을 얻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진화상 설탕과 지방은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설탕과 지방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넘쳐나는 품목이다. 그리고 이런 품목을 과하게 탐닉하면 건강상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차가운 인지의 장점은 새로운 정보를 고려해 우선순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구하기 힘든 설탕과 지방이 보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먹어 두는 것이 건강상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과한 것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차가운 인지는 파악하고서 이제는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뜨거운 인지는 진화상 더 오래전에 고정되어 있었던 데 반해, 차가운 인지는 진화상 더 최신의 것이고 더 유연하므로 새로운 행동 결과에 적응할 수 있다.
이 두 인지는 신경해부학적으로 구분된다. 이 두 인지는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작용한다. 이 두 가지 인지가 존재한다는 첫 번째 징후는 선택적 뇌 손상으로 인해 한 인지가 다른 인지 없이 기능할 수 있는 임상적 사례에서 나왔다. 전향성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이라는 증상이 있다. 이 증상은 뇌 손상, 뇌졸중, 특정 신경 질환 및 특정 약물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이 증상을 앓는 환자는 뇌 손상을 일으킨 사건 이후에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이 뇌 손상 이전에 발생한 사건은 기억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환자가 새로운 의식적 기억은 형성하진 못하지만, 잠재의식 층위에서는 새로운 암묵적 기억은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자는 손바닥에 압핀을 숨기고 매일 아침 악수를 하면서 인사하는 의사를 만났던 것을 의식에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의사와 악수하는 것은 꺼렸다.
뜨거운 인지와 차가운 인지 사이에는 중요한 기능적 차이가 있다고 했다. 느리고 차갑고 의식적인 마음과 빠르고 뜨겁고 무의식적인 신체적 본능, 육감, 기술이 그 둘의 차이이다. 우리의 ‘자아(self)’는 차갑고 느린 인지와 동일시된다. 이는 차가운 인지가 우리의 의식적 자각과 자의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식적 자아 아래에는 우리가 직접 접근하지 못하는 더 크고 더 강력한 다른 자아가 있다. 기(夔)가 어떻게 다리를 움직이고, 우리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걷고 자전거를 타며, 회식 후에도 치즈케이크에 손이 가려고 하고, 전향성 기억상실증 환자가 압핀 의사의 악수를 피하려는 것은 더욱 깊고 진화상 더 오래된 또 다른 자아이다.
무위의 목표는 이 두 자아를 부드럽고 효과적으로 함께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위 상태의 사람에게 마음은 신체화되고, 몸은 마음에 새겨진다. 뜨거운 인지와 차가운 인지, 빠른 체계와 느린 체계라는 이 두 자아는 완전히 통합되어 그 결과는 환경과 완전히 부합한 지적 자발성(intelligent spontane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발성’이란 뜨거운 인지의 특성이고, ‘지적임’은 차가운 인지의 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