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라는 무위에 담겨 있는 무위의 역설처럼, 무위를 달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위 달성에 방해가 되는 걸까? 무위 달성에 방해가 되는 것은 마음의 영역에 속하는 언어, 사고, 논리, 이성이 행동의 영역에 개입하려고 할 때이다. 무위와 언어의 관계에 관해 설명할 때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칭찬’ 행위가 좋은 예가 된다. 흔히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칭찬을 받고 난 후에 그 어마어마한 몸집을 흔드는 고래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춤을 추기 위해 고래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신과 싸우며 고통스러운 훈련을 감내해야 했을까? 고래는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므로 칭찬에 춤을 추기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운 조련이 개입했을 것이다. 조련사는 동물을 조련할 때 배가 부르게 먹이를 주지 않고 늘 조금씩 감질나게 허기를 채워 준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먹이를 더 얻기 위해 동물이 말을 들을 테니 말이다. 자그마한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재주를 부리는 돌고래의 춤이 정말 칭찬의 놀라운 힘 때문인지 의심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고래의 춤에 대한 사실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통속적인 이야기를 한다. 칭찬이 고래에게는 춤을 추게 하는 긍정의 힘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려 한다. 하지만 과연 이런 칭찬이 우리 인간에게도 긍정의 힘으로 작용할까? 내가 친한 친구와 테니스 시합을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오늘따라 그 친구가 너무 잘해 점수는 5 대 2로 내가 지고 있다. 그 친구의 몸 상태를 봐서는 이 경기를 뒤집을 방법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 세트가 남아 있으니 나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이 경기를 뒤집을 묘수가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칭찬’이다. 나는 마지막 세트를 시작하기 전에 함께 물을 마시면서, 그 친구를 보면서 “오늘따라 네 포핸드가 엄청나게 강하고 낮게 깔려서 제대로 받지를 못하겠어. 네 포핸드에 계속 밀리고 내 손목이 다 얼얼해!”라고 칭찬을 했다. 그 친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괜히 오버하지 마시지!”라고 말하며 씩 웃는다.
그리고 마지막 세트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그 친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자. 그 친구는 내 칭찬을 되새기기 시작한다. “내 포핸드 스윙이 정말 오늘 좋은가?”라고 ‘생각’하면서 경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친구의 포핸드 스윙이 흔들리면서 공이 네트에 걸리거나 라인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이럴까? 그 친구는 내 칭찬, 내가 말로 한 칭찬, 나의 언어로 인해 본인의 이성을 동원하여 자신의 포핸드 스윙 동작 하나하나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신의 스윙 동작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칭찬으로 인해 자신의 스윙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하던 포핸드 스윙이 이제는 나의 언어로 촉진된 의식적 사고의 작용으로 인해 부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난 야비한 수로 경기를 뒤집고 그 경기에서 승리하게 된다. 난 언어를 통해 그 친구에게 무위적 테니스, 무아적 테니스를 하지 못하게 작업을 했던 것이다.
왜 칭찬이 고래에게는 통하지만,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걸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래에게 한 칭찬은 우리의 언어가 아닌 표정이나 몸으로 했다는 것이다. 표정이나 몸으로 하는 칭찬은 그 칭찬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그래서 그냥 기분이 좋아지면서 행동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테니스 단식 상대에게 했던 나의 칭찬은 표정이나 엄지척 같은 동작이 아닌 ‘언어’였다. 그 언어에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 내용은 구체성을 가동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 관련이 있다. 고래에게는 이성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래에게는 언어로 칭찬을 해도 이성이 없으므로 칭찬의 내용을 생각할 수가 없지만,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으므로 그 칭찬 내용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몸 자체의 행위가 굳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무위 달성에 치명적인 핸디캡이 된다.
무위에 대한 비슷한 예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1905~1983)의 《창조 행위》(The Act of Creation)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부분과 전체, 구조와 기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축음기 바늘이 홈에 꽂혀 꼼짝 못 하게 되어 같은 구절이 계속 반복되거나 개그맨이 고의로 무대에서 말을 더듬으면서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이 희극적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는 의존적 부분이 독립된 전체인 것처럼 가장하고, 우리의 주위가 그 부분을 전체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강요할 때 부분과 전체, 그리고 구조와 기능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의 예이다. 이런 충돌이 유머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숙련된 기술을 사용할 때, 부분은 부드럽고 자동으로 기능해야 한다. 즉, 부분은 결코 주의의 초점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해당 기술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든, 특정 글자를 발음하는 것이든, 문법 규칙에 따라 문장을 만드는 것이든, 테니스에서 포핸드 스윙을 하는 것이든 간에 부분은 주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 수행을 통제하는 코드는 수행 그 자체보다 의식의 더 낮은 층위에서 기능한다. 즉, 인식의 가장자리나 완전히 자동화된 기술에서는 그 가장자리조차 초월하여 기능한다. 특정 글자를 발음하는 것과 같은 정상적으로 자동화된 부분의 기능에 주의가 집중되는 순간, 축음기 바늘은 홈에 꽂혀 꼼짝달싹 못 하며, 자전거 타기와 바이올린 연주, 포핸드 스윙 등은 마비된다. 이것은 어떤 순서로 백 개의 다리를 움직이는지 질문을 받은 지네가 더는 걷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지네의 역설’이라고 한다. 의식의 낮은 층위에서, 그리고 인식의 가장자리나 그것을 넘어서 작용하는 지네의 걷기는 어떻게 그렇게 걷느냐는 ‘언어적 질문’이 개입되고 그 질문을 듣고 자신의 걷기 방식을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순간 지네의 걷기는 마비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을 적당히 자연스럽게 잘 진행하고 있다. ‘적당히 자연스럽게 잘’은 이미 내가 그 일을 무위 상태에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그냥 계속 그 일을 하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생각과 사고를 동원하지 말고 그 일을 진행하면 된다. 하지만 타인이 개입하고 타인의 언어가 개입할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일에 대한 비난일 수도 있고 칭찬일 수도 있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그런 칭찬과 비난은 내가 하는 일 전체에서 그 부분들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 부분이 잘못된 것일까, 내가 이 부분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특정 부분에 집중하는 순간, 축음기 바늘이 홈에 꽂혀 꼼짝하지 못하든 나의 일 진행은 마비되고 만다. 이와 같은 언어적 집중은 언어적 뒤덮기(verbal overshadowing)로 이어진다. 언어적 뒤덮기란 조너선 스쿨러와 토냐 앵슬레-스쿨러(Jonathan Schooler & Tonya Engstler-Schooler)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만든 용어로서, 기억이나 경험을 묘사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이 기억의 정확성과 생생함을 방해할 수 있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정보를 말로 표현하는 행위가 기억에 저장된 원래의 감각 정보를 덮어쓰거나 변경하여 경험에 대한 덜 정확한 기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타인의 칭찬과 비난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시하기란 이성적 동물인 우리에게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떡하면 될까? 물론 사람마다 방법이 있겠지만, 난 타인의 칭찬과 비난이라는 언어를 그냥 ‘즐긴다’! 내가 하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 보니 그 일이 타인들의 눈에 부각되었다. 타인들은 부각된 나의 일에 자신들도 모르게 이런저런 칭찬과 비난을 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무목적성의 언어에 내가 의지와 의식을 투입하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난 타인의 언어를 즐길 뿐이다. 나의 이성이 개입되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난 즐거움이라는 정서가 개입되게 한다. 정서는 논리가 아니므로 나에게 내가 하는 일의 특정 부분에 집중하게 하지 않는다. 그냥 흘러 지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