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예전에 대학에서 어학교육원 강사로 근무했었다. 그곳에서는 수업도 하지만 원어민 10명을 관리하는 업무도 맡았다. 원어민 강사를 채용하고 관리하며, 필요 시에는 그들의 일상도 도와주는 것이 내 업무의 일부였다. 원어민 강사가 채용되면, 제일 먼저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하는 일을 도와준다. 학교에서 주거보조비 명목으로 50만 원 정도가 나온다. 원어민 강사와 나는 집을 몇 군데 돌아보고 적당한 집으로 결정하고 계약을 한다. 흔히 일정 금액의 전세금을 내고, 매달 월세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전세금에 대한 원어민들의 입장에서 특이한 점이 드러났다. 나라면 전세금은 나중에 다시 돌려받는 돈이니, 전세금을 많이 내고 월세를 적게 내는 계약 형식을 선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원어민들은 가능하면 전세금 없이 월세를 내는 것으로만 계약하고 싶어 했다. 왜 그런지 원어민 강사들과 이야기를 해 보니 자기네들은 저축한 돈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즉, 저축을 통해 목돈을 마련해 두지 못했던 것이었다.
왜 서양인과 동양인 간에 저축에 대한 관념에서 차이가 날까? 이에 관한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특별히 그냥 문화 차이라고만 생각했고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TED 강연 하나를 들었다. 2012년 6월 키스 첸(Keith Chen)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행동경제학자가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는 저축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Could your language affect your ability to save money?)라는 제목으로 했던 강연이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저축 습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강연을 시작하면서 “외견상 비슷한 경제와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왜 매우 다른 저축 습관을 보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언어의 구조와 저축 습관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히고자 한다.
영어와 중국어는 시제 사용에서 차이가 난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비가 내리는 상황에 대해 영어 문화권 화자는 It rained yesterday, It is raining now, It will rain tomorrow처럼 이러한 세 상황을 각각 다르게 표현한다. 반면,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내리는 비에 대해 영어 사용자가 듣기에 매우 어색한 표현을 사용한다. 중국어 사용자는 각각 Yesterday it rain(어제 비 오다), Now it rain(지금 비 오다), Tomorrow it rain(내일 비 오다)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언어 표현상에서 영어는 시제를 엄격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로 구분하지만, 중국어는 시간을 그런 식으로 나누지 않는다. 이런 점에 비추어 영어는 시제성 언어(futured language)이고, 중국어는 무(無)시제성(futureless language) 언어이다. 시제가 있는 영어는 미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사건을 문법적으로 현재와는 구별해서 다르게 표현한다. 이에 반해 시제가 없는 중국어는 미래 사건을 현재와 구별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영어와 같은 시제성 언어의 경우에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는 거리가 있지만, 중국어와 같은 무시제성 언어의 경우에는 현재와 미래가 같은 곳에 있으므로 둘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축과 시제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먼저 저축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저축이란 개인이나 조직이 지금 당장 사용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적립하는 돈을 말한다. 저축은 현금이나 은행 예금, 투자 또는 다른 유형의 자산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저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저축은 의료비나 자동차 수리비와 같은 예상치 못한 비용을 충당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둘째, 저축은 집을 사고, 사업을 시작하거나 은퇴를 위해 저축하는 것과 같은 재정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셋째, 저축을 하는 것은 실직이나 경기 침체와 같은 재정적 어려움에 대한 완충재를 제공한다. 넷째, 저축한 돈이 있으면 재정적인 문제와 관련된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흔히 저축을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저축을 위해서는 현재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등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 즉,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는 것이 저축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우리 인간은 현재적 동물이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곳(here and now)이 중요하다.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과거의 일에 대해 생각하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 가까이 있지 않다. 내 옆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무언가 불안하고 불안정한 느낌이 든다. 내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역사에서 보면, 왕이 대장군을 임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적군을 공격하도록 할 때, 그 대장군의 식구는 왕 옆에 둔다고 한다. 이는 대군을 거느린 대장군이 왕에게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많은 대군을 거느린 대장군이 왕 옆에 없다. 이는 왕에게 불안감을 주는 요인이다. 사랑하는 연인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인간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좋아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인간은 침팬지 같은 영장류이다. 침팬지는 우리 인간과 DNA의 98%가량을 공유한다. 우리 몸에는 침팬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경쟁도 즐기는 이성적 동물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타인이 아닌 자신의 현재 상태가 행복하도록 행동하게 하는 인지적 기제이다.
저축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지금 자신의 행복 상태를 희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축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성향과 맞지 않는다. 영어권 문화의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막연한 미래를 위해 지금의 현재 상태를 희생하면서까지 저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현재 저축을 하고, 그 결과를 보기 위해서는 현재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미래 시점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저축 성향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어에는 현재와 과거가 같은 시점이나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중국 사람은 미래의 결과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서까지 저축을 한다. 중국인에게 이러한 저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현재와 미래가 같은 곳에 있거나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저축하면 그 결과인 미래가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지금의 저축 희생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저축 습관의 차이가 시제 차이로 설명되듯이, 시제 차이가 있는 언어마다 건강 관련 문제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흡연은 어떤 면에서 ‘부정적 저축’이다. 저축이 미래의 기쁨을 위한 현재의 고통이라면, 흡연은 정반대이다. 즉,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고통을 맞바꾸는 것이 흡연의 성격이다. 무시제성 언어 사용자는 시제성 언어 사용자보다 흡연 가능성이 20~24% 낮았고, 은퇴할 즈음 비만일 가능성이 13~17% 낮았으며, 가장 최근에 가진 성관계에서 콘돔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한 확률이 21% 더 높았다. 흡연과 폭식, 콘돔 없이 하는 성관계가 현재에는 즐거움과 좋은 자극을 준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결과는 미래에 나온다. 시제성 언어에서는 현재와 미래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미래의 부정적 결과가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으므로 지금 현재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담배를 피우고, 폭식하고, 콘돔 없이 성관계도 하는 것이다. 반면에 무시제성 언어의 경우에는 현재 바로 옆에 미래가 있으므로, 현재의 쾌락이 미래의 고통 바로 옆에 있다.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고, 고통이 쾌락 바로 옆에 붙어 있으므로 그 고통이 중요하게 되고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흡연과 폭식, 콘돔 없이 하는 성관계라는 부정적 저축을 지양하는 것이다.
시제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저축 간에 이러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내용은 성향에 관한 것이지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하게 될 긍정적 또는 부정적 행동이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다는 미래의 개념화가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의 행동 패턴도 그에 따라 긍정적인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는 미래라는 먼 시간을 막연하고 적대적인 것이 아닌 우리 가까이에 있는 친구로 받아들이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