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새벽 일찍 학교에 도착해 샤워장으로 향했다. 샤워하고 나오니 6시였다. 2층 샤워장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데, 수학과 여 교수님이 마스크를 하고 체육복 차림으로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집은 부산인데 여기 진해까지 출퇴근한다고 알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에서 새벽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 뒤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그 교수님께 엄지척을 보내주면서 “새벽 운동 쉽지 않은 데 정말 대단하시네요”라고 말했다. 그분은 그리 대단한 것 아니라고 하면서 웃으셨다. 우린 서로 파이팅을 외치고 각자의 공간으로 이동해 갔다.
‘새벽 운동’을 포함해 자기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대단할까? 이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현시점을 희생하면서 고통을 견뎌내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에 더 나아진 자신의 모습이라는 희망을 품고는 있지만, 여하튼 지금의 고통을 인내하고 있다.
연구실로 걸어가는 데 헬스트레이너와 재활 전문가가 되려고 열심히 운동하는 아들 생각이 났다. 지금은 집 근처 헬스장에서 근무하면서 일도 배우고 자기 몸도 관리하고 있다. 작년 3월에는 바디프로필 사진 촬영을 했다. 3월에 사진을 찍기 위해 5개월 전부터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하면서 생활을 했다. 즉, 우리 아들은 그 5개월간 고통을 인내하고 있었다. 사진 촬영일이 가까워지면서 참기 힘들 때는 우리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마침내 사진 촬영이 끝나고 너무 행복해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올해 3월에도 사진 촬영을 했다. 이번에는 근육을 더 단련하기 위해 살을 찌운 상태에서 운동과 식단 조절을 했다. 본격적인 운동 전에는 살을 찌우기 위해 야식도 먹곤 했다. 본격적인 운동과 식단 조절을 하면서 아들은 다시 현재의 편안함을 희생하고 고통을 인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작년과 똑같이 무사히 사진 촬영을 잘 마쳤다. 그리고 헬스장의 프로필사진을 새로 찍은 사진으로 업데이트해 놓았다.
사실 우리 아들에게는 사연이 있다. 아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을 했고, 그 시절은 필리핀과 독일에서 생활했다. 한국에서 중학교 1년을 다니다 도중에 필리핀으로 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바로 필리핀에 있는 산카를로스대학(University of San Carlos)의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뒤 1학기를 마치고 휴학(?자퇴)한 뒤에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몇 개월 보낸 뒤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Leipzig University) 입학을 목표로 하고 독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먼저 딩덴(Dingden)이라는 곳에 있는 기숙형 어학원에 들어가 6개월 정도 교육을 받았다. 그때 아들 나이가 열여덟 살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기숙사에 박혀 생활한다는 것이 고통이었다. 아들은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고 학원 수업도 빼먹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6개월간의 학원 생활을 마치고 라이프치히대학에 있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곳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다. 외롭다 보니 고양이를 구해 그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했다. 문제는 그 기숙사에서는 애완동물 금지 조항이 있었다. 결국 기숙사 측에서 아들의 고양이 상황을 알게 되어 아들은 기숙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갑자기 생활공간이 사라진 아들은 직접 독일의 부동산 회사를 찾아가 집을 마련했다. 독일어가 유창한 것은 아니지만 생존 독일어를 구사해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어 집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이제는 라이프치히대학의 기숙사가 아닌 그 도시 내 일반 주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사실 아들은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다. 시내에 있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주로 생활했다. 주변에 있는 형, 누나들과 여러 나라로 여행도 다녔다. 아르바이트하던 곳이 식당이다 보니 요리를 전문으로 하면서 나중에는 독일에서 식당을 개업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여하튼 아들은 2년 2개월간의 독일 생존 생활을 마치게 된다.
아들은 독일 생활을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귀국했다. 그 당시에는 군 복무를 바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얼마간 대기해야 했다. 그동안 아들은 몇 개월간 서울로 올라가 술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다. 내가 학회 일로 서울에 올라가 아들을 서울역에서 만났다. 아들은 겨울인데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살도 엄청나게 빠져 있었다.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여 서울역 식당에 들어가 국밥을 한 그릇 먹었다. 집으로 같이 가자고 하니 아들은 괜찮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우린 결국 서울역에서 헤어져 난 내 일을 하러 갔다. 혹시나 하고 그날 저녁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에 같이 집으로 가자고 설득을 했다. 아들도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들다 보니 내 의견을 따라 주어 결국 다음 날 아침 아들과 같이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집에 내려와 생활하던 중 하루는 아들에게 우편물이 하나 와 있었다. 3백만 원 대출금에 관한 내용이었다. 너무 놀라 아들에게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돈이 필요해 그 돈을 대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집 근처 민원센터에서 신분증 재발급을 받던 중, 그곳에 떨어진 지갑이 하나 있어서 가지고 왔다. 그 안에 돈은 없고 신분증만 있어서 신분증은 버리고 지갑은 좋아 보여 아들이 가졌다. CCTV에 아들이 그 지갑을 가져간 것이 보여 지갑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 결국 아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지갑 주인은 아들에게 100만 원의 합의금을 요구했다. 경찰관도 그 돈이 너무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아들에게 집 어른에게 이야기해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그 일을 혼자 처리하려다 보니 돈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돈을 마련해 보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 대출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대출금 사건이 있고 난 직후에 아들은 훈련소에 입소했다. 훈련을 마친 뒤에 아들은 집 근처에 있던 장례식장에서 공익 요원으로 근무했다. 대출금 상황은 아들이 받은 월급으로 매달 해결해 나가면서 결국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아들에게 큰 문제가 하나 터졌다. 공익 근무를 몇 개월 남겨 놓았는데, 아내가 아들 행동이 이상하다고 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고, 공익 근무를 위해 출근은 하지만 그곳에서도 생활이 엉망이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술을 마셨으니 공익 근무가 엉망인 것은 당연했다. 아들이 거짓말도 많이 하고 잠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는 일이 허다했다. 아들의 표정과 눈빛도 이상해 보였다. 처음에는 마약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같이 검사를 하자고 했더니, 아들은 절대 마약을 한 적은 없으니 검사하러 가는 것에 동의했다. 그날 저녁 아들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 정신과 의사인 막내 동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처제에게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막내 동서는 아들의 증상을 이야기하니 바로 ‘조울증’인 것 같으니 정신과 입원 치료를 권했다. 조울증이란 조증과 우울증이 동시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아들이 잠도 자지 않고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듯한 기분은 조증의 증상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은 우울증의 증상도 나타난다.
문제는 병원에 입원하는 방식이었다. 아들이 순순히 가지는 않을 것이니, 어쩔 수 없이 강제 입원 방법을 택해야 했다. 막내 동서의 도움으로 그 절차 등을 파악한 뒤 우리는 경찰과 사설 119 구급요원을 동원했다. 그날 아들이 새벽에 술을 마시고 있는 곳에 우리가 가서 아들을 강제로 구급차에 태워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아들은 발악했지만 우리는 냉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고, 난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도 아들은 무조건 퇴원하기 위해 우리에게 발악을 계속했다. 아내는 매주 병원에 가 아들에게 먹을 간식과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었다. 아들은 피검사 등을 하면서 아들에게 맞는 약과 복용량을 결정할 때까지 그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3개월 정도 지나고 병원에서 아들이 퇴원해도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무서웠다. 아들이 정말 다 나았을까? 아니면 다시 입원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등 온갖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날부터 아들은 자기 방에만 박혀 밖을 나오지 않았다. 혹여나 밖을 나가는 일이 있으면, 입원 전의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아내와 나는 노심초사했다. 한 번은 아들이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하게 아들에게 달려갔다. 아들은 울면서 강제 입원시킨 것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았다. 한편으론 아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나에게 털어놓아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아들은 퇴원 직후부터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약을 먹어야 했다. 흔히 정신과 약을 환자들이 먹지 않고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 약을 거실에 두고 아들에게 먹는 것을 확인해 달라고 했고, 아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협조적이었다. 우리가 없어도 약을 먹고 나면 그 약봉지를 거실에 두어서 약 먹었다는 표현을 해주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남은 몇 개월의 군 복무를 다 마쳤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만 있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들을 헬스장에 보내 PT를 받게 했다. 처음에는 아들은 귀찮다고 하면서 하지 않으려 했다. 설득 끝에 아들을 데리고 유명하다는 PT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쉽게도 그 선생님은 이미 시간이 나질 않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헬스장 PT 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소개받은 그곳은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이므로 아들에겐 더 편리한 곳이었다. 이렇게 아들은 그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전에 퇴원하고 집에만 있지 말고 운동하게 하려고 애플워치를 사 주겠다고 했는데 필요 없다고 했었다. 근데 그 헬스장에 다니면서 운동을 하고 난 뒤 애플워치를 사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 기쁜 마음에 당장 사 주었다. 이렇게 PT를 받으면서 운동을 하니 아들의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조증은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는데, 그 발산 영역이 운동이었고, 운동 후에 좋은 에너지가 발산되니 우울증 증상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더 좋은 것은 아들과 그 PT 선생님 간의 관계가 끈끈하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은 아들에게 헬스장 관리 아르바이트 제안을 했다. 아들 역시 그곳에서 어차피 운동하니 그 아르바이트 제안은 아들에게는 좋은 것이었다. 이렇게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헬스장 관리를 하면서 몸만들기를 하고 프로필사진도 찍고, 그 선생님과 다양한 교육을 같이 받으러 다니면서 PT와 재활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들에게 수업받는 학생도 생긴 상황이다.
요즘 나는 우리 아들을 존경한다. 우리 인간은 현시점(here and now)의 존재이다. 인간은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이 가장 편하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므로 현시점의 편안함을 포기하기 싫어한다. 즉, 인간은 고통을 싫어하는 존재이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뉜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품고 살지만, 이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면서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저축이다. 저축은 지금 현시점에서 먹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돈을 아끼는 것이고, 이는 곧 먼 막연한 미래를 위한 것이다. 현재의 고통을 참는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자기 관리를 위한 운동이다.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편하다. 그런데 억지로 몸을 가혹하게 만들어 운동하는 것은 어쩌면 고통이다. 그 고통을 참는 것은 미래 자신의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위한 것이다. 나는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인다. 이 사상은 현대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불멸과 무한 장수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사실 나는 불멸과 무한 장수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두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증이 있다. 그러한 고통과 통증 없이 이 삶을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고통은 무조건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고통을 만들어 그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들도 있다. 꾸준히 운동하면서 몸을 만드는 수학과 교수님과 우리 아들이 그런 사람에 속한다. 고통을 참아내는 이 두 사람에게 오늘 난 엄지척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