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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Jul 13. 2023

기억의 역설

팔순이 훨씬 넘은 모친이 계신다. 요즘 어머니는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한다. 형님과 누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정신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수면제를 처방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제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절대 안 가시겠다는 것이다. 


사실 최근에 아버지께서도 1주일 동안 두통이 너무너무 심해 응급실까지 가실 정도였다. 신경과 약을 처방받고 먹었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막내 동서가 정신과 의사라서 상의를 하니, 정신과 진료를 받고 약을 조금 먹으면 괜찮을 수 있다고 했다. 바로 그다음 날 아버지를 모시고 정신과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저녁에 주무시기 전에 한 번만 먹으면 되는 약이라 먹기 번거롭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그 약을 먹으니 두통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3일째에서 두통이 참을 만할 정도가 되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1주일에 한 번씩 다시 진료를 받고 부친에게 맞는 약의 양을 조절하면서 계속 복용했다. 3주 정도가 되니 두통은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한 달에 한 번만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이렇게 아버지의 두통은 정신과 약으로 치료를 잘하는 중이다.


어머니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도록 설득하기 위해 아버지의 사례를 들었다. 결국 어머니는 내 말을 듣고 정신과 진료를 받기로 했다. 의사의 질문에 답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하는 것이, 자려고 누우면 결혼 초기에 집안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기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50년도 지난 일인데 아직도 밤만 되면 그 기억이 어머니를 괴롭혔던 것이다. 2시간도 채 주무시지 못하니 낮에는 어지럼증을 겪었다. 밤에 잠을 잘 주무시니 낮에 졸리기도 했다. 하지만 낮에 자면 밤에 잠을 더욱더 못 잘 것 같으니, 낮잠을 주무시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해 억지로 외출을 나가셨다. 이렇게 잠과의 전쟁에서 어머니는 패잔병이 되셨다. 패잔병의 모습으로 동네를 걸어 다니셨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께서 모친이 연세가 있으시니 약을 독하게는 쓸 수 없고, 1주일 정도 약을 먹고 그 양을 조절하자고 하셨다. 다행히 그 약을 드시고는 5시간 정도 주무시게 되었다. 하지만 더 많이 주무셔야 한다는 것이 의사 선생님의 의견이었다. 아직 어지럼증은 그대로이다. 어머니는 좀 더 시간을 갖고 꾸준히 많은 잠을 자면서 ‘나쁜 기억’과 전쟁 자체를 하지 않으셔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기억을 크게 감각기억, 단기기억, 장기기억으로 나눈다. 감각기억은 기억 처리의 가장 초기 단계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우리의 감각에서 나온 정보가 1초 미만에서 2, 3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등록되고 유지되는 기억이다. 감각기억은 외부 자극에 따라 영상 자극(시각), 잔향 기억(청각), 촉각 기억(촉각)이라고도 부른다. 흥미롭게도,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그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감각기억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감각기억의 정보는 일반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저장되며 새로운 감각 데이터로 빠르게 대체된다. 감각기억은 우리에게 감각 정보를 짧게 보유하게 하고, 우리가 주변 환경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감각기억은 지속 시간이 1초 미만에서 길어야 3초이므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냄새나 맛에 대한 후각 기억과 미각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단기기억으로 들어가고, 단기기억에서 다시 장기기억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감각기억은 금방 우리 곁을 떠난다. 감각기억은 투박하고 거칠고 도전적인 이 환경에서 우리 인간이 위험하지 않도록 딱딱한 바닥에 깔아주는 매트 같은 완충재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감각기억은 우리 인간에게 너무나도 유익하고 고마운 기억이다. 내가 앞서 우리 모친이 갖고 있다고 말한 ‘나쁜 기억’은 감각기억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두 기억인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중에서 어떤 것이 나쁘고 위험한 기억일까? 작업기억이라고도 하는 단기기억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처리하거나 사용하고 있는 정보를 우리의 의식 속에 일시적으로 보유하고 조작하는 제한된 용량의 기억이다. 단기기억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정보를 저장하고 조작하는 역할을 한다. 단기기억은 문제해결, 의사결정, 이해, 추론 등 다양한 인지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시작 부분을 마음속에 두고서 나머지 부분을 읽는데, 이는 단기기억으로 수행되는 작업이다. 동시통역도 단기기억의 예이다. 그리고 단기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완전한 개념이 아니다. 단기기억은 소량의 정보(약 7개 항목 또는 그 이하)를 짧은 시간(약 10~15초 또는 최대 1분) 동안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능동적인 상태로 마음속에 담아둔다. 단기기억은 우리가 일을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억이므로 나쁜 기억이 아니라 유익한 기억이다. 단기기억은 ‘뇌의 포스트잇 노트’라고도 불릴 정도로 우리 업무 처리에서 도움을 준다. 단기기억은 그 용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오래 머물지 않고, 잠시 우리를 도와주고서는 우리를 곁을 떠난다. 단기기억은 감각기억과 장기기억 사이의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할 뿐이다. 단기기억에 있는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장기기억으로 전송하여 더 영구적인 저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쁜 기억은 이제 하나 남은 장기기억뿐이다. 장기기억은 기억 처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로서, 몇 분에서 몇 년, 심지어 평생에 걸쳐 정보의 저장과 검색을 담당한다. 장기기억은 우리가 과거의 경험, 지식, 기술 등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은 ‘돈 빌리기와 빌려주기’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그 사실은 내 단기기억 속에 저장되어 금방 희미하게 사라진다. 결국 난 그 돈을 갚지 않게 되어 친한 친구로부터 신뢰를 잃어, 돈은 벌었지만 친구는 잃는 상황이 초래된다. 반면에,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 사실은 내 장기기억 속에 저장되어, 그 돈을 받지 못하면 평생 망각되지 않고 내 기억 속에 공고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기억 용량은 너무나 제한적이라서 평생 기억에 남는 기억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경험과 지식, 정보는 평생 기억되지 못하므로 기록에 남겨 그것을 참조하면서 우리 삶에 활용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기억에 있어서 취약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기억이 평생 장기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추측건대 ‘나쁜 기억’일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청혼하기 위해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프러포즈를 한다. 그 여성은 너무나 감격해서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한다. 결혼 후에 남편은 여성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불륜을 저지른다. 우여곡절 끝에 그 불륜 사건을 덮고 다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 여성에게 프러포즈의 기억은 ‘우군’이고 불륜의 기억은 ‘적군’이다. 이때 우군이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까? 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문득 그 여성은 나쁜 기억의 공격을 받아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기억에 남은 프러포즈라는 우군이 도와준다고 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기억 용량이 제한적이라 나쁜 기억 또한 잊힐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나쁜 기억이 망각되지 않을 때이다. 좋은 기억은 망각되어도 되고, 망각되지 않아도 된다. 좋은 기억은 우리 삶에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기억은 좋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우린 삶에서 상황이 잘 풀리는 경우는 대비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잘 풀리게 되면 그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혹시라도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해임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니 대비책을 미리 고민하고 필요하면 마련도 해야 한다. 


우군의 기억과 적군의 기억 모두 몇 시간 정도 장기기억 속에 들어가겠지만, 평생의 장기기억 속에 들어가는 것은 적군에 대한 나쁜 기억이다. 나는 이것을 ‘장기기억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좋은 기억은 장기기억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은 미치지 않는다. 반면에, 나쁜 기억은 장기기억에 들어가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장기기억의 역설이다. 지금 우리 어머니가 장기기억의 역설로 인해 고통을 받는 중이다. 역설은 말 그대로 역설이다. 역설은 그 자체와 모순되거나 우리의 상식이나 직관에 반하는 상황을 말한다. 문제는 역설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풀린다면 그것은 역설이 아니다. 오늘도 나쁜 기억이라는 적군과 싸우고, 그 싸움에 패배하여 온갖 상처를 입은 우리 모친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미약한 나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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