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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Oct 30. 2023

손흥민 선수의 뛰어난 분산 인지 능력

강연 촬영 현장


1주일 전에 진주에 있는 서경방송이라는 곳에서 강연을 촬영하고 왔다. 이 촬영은 진주상공회의소에서 기획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30분 분량의 강연을 녹화해 방송하는 상황이었다. 방송 촬영은 처음이라 부담이 많이 되었지만, 담당 PD님이 녹화 방송이고 강연 중에 어색한 부분은 자기가 적절히 편집하니 편하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라이브 방송이 아니고 녹화 방송이므로 나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중간에 잠시 중단하고 그 부분부터 다시 촬영하면 된다고 하면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메이크업을 간단히 하고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PD님과 방송국 측 담당자 몇 명이 나를 따라 들어왔다. 내 귀에 이어폰을 끼워주고 몇 가지 간단한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는 모두를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미리 설치되어 있던 카메라를 보고 강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어색함도 익숙해지면서 그럭저럭 강연을 마쳤다. 거의 1시간 정도 녹화를 했다. 이 분량으로 PD님이 잘 편집해 주신다고 했으니, 나는 악마의 편집이 될지, 천사의 편집이 될지 모른 채 방송국을 나왔다.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 순간 글 쓰고 책 읽는 일이 이런 어색한 방송 촬영에 비하면 나한테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방송 촬영이 아니었다. 처음에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내용으로 하면 되냐고 물었다. 이번에 출간한 내 번역서 《생각을 기계가 하면, 인간은 무엇을 하나?》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일전에 브런치스토리에 올린 글 〈ChatGPT와 인공지능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가 생각나 이 주제로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강연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내가 할 강연이 전체 5회 분량 중 4회차에 해당하고, 이 프로그램의 제목이 ‘리더의 품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ChatGPT’와 ‘리더’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 문제 없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3회까지 리더와 러더십에 대한 강연이 방송으로 나갔고, 4회차인 내 강연에서 ChatGPT와 인공지능에 대한 인문학적 내용을 소개하고, 마지막 5회차에 공학 전공자가 ChatGPT의 활용법을 강연해 준다고 하면서 내 주제가 전체 방송 내용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리더에서 인공지능으로 타고 넘어올 수 있는 연결고리가 빠져 있다는 찜찜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촬영은 해야 하니 나는 주최 측의 말만 믿고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 내용은 크게 세 개 꼭지로 구성했다. 먼저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인공지능이나 ChatGPT가 인문학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인공지능이 실제로 인간의 지능(intelligence)과 인지(cognition)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인공지능이 3층으로 구성된 인간의 뇌 구조 중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담당하는 신피질(neocortex)과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로 이루어진 3층 부위를 모방한 것이라는 내용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인간 뇌의 특정 부위만 모방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 활동을 도와주는 인지적 인공물로서의 기술이자 도구라는 내용을 소개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인지 활동을 인지적 인공물이라는 도구로 확장하고 분산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를 분산 인지(distributed cognition)라고 부른다. 인간의 복잡한 인지가 개인의 뇌에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인공물로 기능하는 도구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서도 수행된다는 것이 분산 인지의 핵심이다. 펜과 종이의 도움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 분산 인지 활동의 대표적인 예이다. 수학 문제 풀이라는 인지 활동이 인간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펜, 종이 사이의 역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의 결과로 일어난다. 내가 방송국에서 강연을 녹화하는 것도 분산 인지의 예가 된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특정 주제를 말로 설명하는 인지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방송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메이크업을 해 준 코디, 카메라 감독, 마이크 담당자, 그리고 PD님 등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즉, 나는 나의 인지를 이처럼 여러 전문가에게 확장하고 분산시키는 것이다(여담이지만 이 부분을 설명할 때 PD님이 갑자기 끼어들어 내용이 너무 좋으니 다시 한번 더 정리해 달라고 해서 같은 말을 좀 더 다듬어 새로 녹화했다. 아무래도 방송국 측도 나의 분산 인지 활동에 참여한다는 말이 PD님의 마음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인간 뇌의 3층 구조


이런 내용으로 강연을 마치고 나오면서도 계속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인공지능’과 ‘리더’의 불일치성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리더 또는 리더십을 무위(無爲)의 개념에 비추어 설명했다. 내가 말하는 무위는 ‘말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으며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행동’이다. 이 무위 개념을 리더십에 적용하면, 진정한 리더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몸에 힘이 들어가 부하들에게 불편함을 줘서도 안 되며,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드러내어서도 안 된다. 즉, 진정한 리더는 무위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무위는 이성과 합리성이 배제된 정신 상태이다. 3층 구조로 되어 있는 뇌 구조에서 1층은 생존 기제로 이루어진 뇌 부위로 ‘파충류의 뇌’라고 부르는데, 이는 결국 ‘생명의 뇌’이다. 2층은 감정, 기억, 습관 등 변연계로 이루어진 뇌 부위로 ‘포유류의 뇌’라고 부르며 또는 감정의 뇌라고도 한다. 3층은 신피질과 전전두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뇌’이고, 이는 이성, 논리, 합리, 언어의 영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이성의 뇌라고도 부른다. 뇌의 이 3층 구조에서 무위 상태에 있는 진정한 리더는 3층 부위인 이성의 뇌의 작동을 일시 정지시키고, 감정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유대 기능을 하는 2층 부위인 포유류의 뇌에 의존하는 사람이다.

출처: https://pixabay.com/illustrations/brain-triunique-reptilian-limbic-2235831/

내 강연에서는 뇌의 1층과 2층 부위인 파충류의 뇌(생명의 뇌)와 포유류의 뇌(감정의 뇌)가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3층 부위인 인간의 뇌(이성의 뇌)와 리더의 관계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 오늘 아침 ‘분산 인지’의 개념을 리더십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방송 촬영 중에 PD님이 좋아했던 나의 예시가 큰 단서가 되었다. 나는 강연이라는 인지 활동을 하고 있고, 이 강연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촬영되고 있다. 즉, 이런 나의 인지 활동은 방송국의 여러 전문가라는 인지적 인공물로 분산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냥 나와 방송국 전문가들 간의 상호작용이고 협력이고 통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상호작용, 협력, 통합은 당사자들 간의 위상이 동등하다. 어느 정도 완성된 각자의 전문지식을 모두 밖으로 꺼내놓고 이런 지식들이 잘 결합해 특정한 일이 온전히 마무리되는 것이 협력이고 통합이다. 


하지만 협력과 통합의 개념에는 그 활동의 핵심 주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특정 주제에 대한 강연 촬영에서는 협력과 통합의 개념을 넘어 핵심 ‘주체’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 강연 촬영에서 핵심 주체는 강연자로서, 강연자는 자신의 인지 활동을 외부 전문가들의 전문지식으로 분산한다. 이런 전문가들은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강연자의 분산 인지 활동을 담아두는 외장하드 같은 수동적 장치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다양한 기억 자료와 학습 자료를 계속 내 머릿속에 두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 즉, 인간의 인지 활동은 비용이 많이 든다. 인간의 뇌는 매일 섭취하는 칼로리의 4분의 1이 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래서 내 인지 활동의 비용과 에너지를 덜기 위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스마트폰이나 외장하드에 이런 자료를 저장해 둔다. 


강연 촬영에서 주체이자 ‘리더’는 자신의 인지 활동을 외부 전문가들에게 분산하는 강연자이다. 강연자의 머릿속에 특정 주제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다면, 강연 촬영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연자로서의 리더는 많은 전문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전문지식이란 이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책을 읽고 학습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다듬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 탄생한 것이 전문지식이다. 즉, 전문지식은 인간의 뇌 구조에서 이성의 뇌에 해당하는 3층 부위에 들어 있다. ‘리더의 품격’을 갖춘 사람은 ‘이성의 뇌’를 최대한 활용해서 많은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이고, 이런 전문지식을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특한 전문지식을 갖춘 외부인들에게 분산하고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손흥민 선수의 분산 인지


리더는 똑똑하고 많은 것을 알고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리더의 품격은 이런 실력을 자기 머릿속에만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에게 분산할 수 있을 때 나온다. ‘실력’과 ‘리더의 품격’이라는 말은 최근에 토트넘 홋스퍼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팀의 주장 손흥민을 생각나게 한다. 2023~2024 시즌에서 현재까지 10경기를 치른 토트넘은 리그 1위에 올라와 있다. 이번 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초반에 ‘손흥민 리더십’은 EPL의 화두로까지 떠올랐다. 탐 동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뛰어난 통솔력과 그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이 전 세계 축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손흥민은 경기 중에 팀 동료들에게 귓속말로 작전을 지시하면서 경기 흐름을 유리하게 돌린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경기 중에 실수를 한 어린 선수에게 다가가 따끔한 조언을 해 주고 그리고는 바로 웃는 얼굴로 안아주는 모습도 보인다. 바로 이것이 축구 도사 손흥민이 자신의 지식을 동료 선수들에게 분산하고 있는 모습이다.


축구는 여러 전문가로 구조화되어 있다.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 상대의 공격을 막는 수비수, 공격진을 지원하는 미드필드, 좌우 윙어, 그리고 최전방 공격수가 있다. 축구에서 꽃은 골이다. 골을 넣어야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니, 선수들의 플레이가 아무리 좋고, 볼 점유율이 아무리 높고, 유효슈팅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골을 넣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축구 ‘지능’이 뛰어난 손흥민은 현재 토트넘에서 최전방 공격수로서 거의 매 경기 결승 골을 넣으며 팀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고 있다. 


손흥민은 ‘리더의 품격’을 갖춘 토트넘의 주장이다. 그는 축구에 관해서 많은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축구 지능과 실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손흥민은 이 지능과 실력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골키퍼에서부터 수비수, 미드필드와 윙어라는 각 전문가에게 분산한다. 손흥민의 축구라는 인지 활동이 동료 선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분산되면서 그 팀은 하나가 되고, 마침내는 골을 넣어 승리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리더의 품격’을 갖춘 ‘진정한 리더’는 뇌의 3층 부위인 ‘이성의 뇌’가 다양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다른 전문가들에게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분산해 주어야 한다. 손흥민 선수는 최근에 뛰어난 분산 인지 능력을 발휘하면서 진정한 리더의 품격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팀은 승리하여 현재 EPL 1위에 올라와 있다. 이런 손흥민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요즘 나는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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