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4명이 정기적으로는 아니라도 가끔씩 만나 소주 한잔하는 모임이 있다. 순전히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내가 회장이고, 모임의 비용을 관리하는 총무가 내 밑에(?) 있다. 그리고 나머지 2명은 이사라는 직함은 주었지만, 그냥 회원으로 계급상 제일 밑이다. 1주일 전에 이번 주 수요일에 횟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의견을 모았다. 모두들 회도 맛있게 먹고 소맥과 소주도 마신다는 들뜬 기분으로 한 주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월요일에 문제가 하나 터졌다. 내가 테니스를 하다가 오른쪽 발바닥 옆쪽에 갑자기 인대인지 근육인지 모르지만 뭔가 똑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왔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바로 병원에 가려고 긴 우산에 의지해서 간신히 병원으로 달려갔다(아니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날이 7월 31일이다 보니 내가 다니는 정형외과가 휴가 중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날 저녁은 약국에서 진통소염제를 하나 사서 먹고, 부은 발바닥에 냉찜질하면서 자체 치료를 했다.
화요일 아침 9시에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로 확인을 해 보니 발바닥 옆면에 석회석이 생겼고, 그 주변에 염증도 생겼다고 했다. 병명은 ‘석회성 힘줄염’이었다. 다행히 인대나 힘줄, 뼈에는 이상이 없어서 물리치료와 주사,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소염제를 먹을 때는 술을 마시면 안 되기 때문에 총무와 상의해 내일(수요일) 모임을 연기하기로 했다. 총무는 회장인 나에게 카카오톡에 그 내용을 올려 주면 모두 한 마음으로 내 상황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총무는 배구가 전공인 체육과 교수라, 내가 진단받은 그 증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압박 붕대를 감고 있고, 수시로 냉찜질도 많이 하면 괜찮아진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요즘은 불볕더위이니, 이번 참에 테니스는 쉬면서 체력도 좀 회복하라고 권했다. 나는 탄체 카카오톡에 “우리 회원님들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 모임을 좀 미뤄야 할 듯합니다. 제가 어제 테니스 중에 발바닥 근육과 인대 부상으로 움직임이 불편하고, 더 심하게는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해서요 ㅠㅠ”라고 글을 올렸다. 내가 글을 올리자 우리 총무는 바로 이런 댓글을 올렸다. “회장 해임안 추진하겠습니다”. 이 답장을 읽으면서 난 혼자 씩 웃으면서 “제발요 그것만은 참아주세요.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ㅋㅋ”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어떤 상황에 객관적으로 맞는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어적이거나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반응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그 상황에 논리적으로 맞는 반응도 한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맞는 반응은 식상하고 자극도 없고 재미도 없으며, 두 사람 사이에 객관적인 거리가 유지되어 인간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다른 프로그램은 안 보지만, KBS 주말 드라마는 생방송을 사수한다. 주중 저녁에는 VOD로 지나간 그 드라마를 틀어 놓고 저녁밥을 먹으면서 그날 저녁을 마무리한다. 지금 방송되는 주말 드라마는 《진짜가 나타났다》이다. 31회에서는 이런 줄거리로 진행되었다. 임신한 주인공 연두가 하혈하면서 길에서 쓰러지고, 그 모습을 동시에 본 준하와 태경이 연두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다행히 산모와 아이 둘 다 이상이 없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과일을 먹고, 할머니는 독서 모임을 해야 하는데 연두가 왜 이렇게 안 오냐고 말한다. 태경은 어머니에게 전화해 연두가 유산할 뻔했지만, 연두와 아기 모두 괜찮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면서 산모가 현재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 아무도 병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전화로 연두와 통화하면서 왜 그리 조심성이 없다고 소리 지르고, 그러다 더 큰일이 났으면 어쩔 뻔했냐고 야단치며 화를 낸다. 연두는 자기가 없으면 공부도 안 하시고 좋으시지 않냐고 말하고, 할머니는 너 없으니 편하고 좋다고 소리치고 이제 절대 오지 말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이 말을 들은 연두는 전화기를 보면서 웃는다. 이 모습을 본 태경은 왜 그렇게 웃냐고 묻는다. 연두는 할머니가 ‘걱정을 화로 표현하신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슬퍼도, 걱정돼도, 외로워도 화를 내신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할머니는 처음에 연두를 매우 못마땅해 여겼기 때문에, 연두는 할머니가 자기 걱정을 해 주신다는 게 신기하다고 말한다. 태경이 그런 연두가 대단하다고 하니, 연두는 자기가 대단한 게 아니라 ‘할머니가 사람이신 거라’고 말한다.
동물, 특히 포유류에게도 뇌는 있다. 포유류는 새끼를 낳아서 젖을 먹여 기르는 동물이다. 포유류는 자궁 안에서 탯줄을 이용해 어미의 영양을 새끼에게 공급해 주고 어느 정도 새끼가 자란 후에 낳는 것이 특징이다. 포유류의 뇌는 감정과 느낌을 주로 담당하는 변연계로 이루어져 있다. 변연계가 있는 포유류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동물의 감정 표현 방식에 대해서는 아마 연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만약 없다면 동물학자들에게 그러한 연구를 제안드린다). 내가 동물학자가 아니라서 증거는 댈 수 없지만, 나는 포유류동물이 인간처럼 자극과 감정 사이에 일대일 대응은 가능하지만, 드라마 속 할머니처럼 다대일 대응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동물도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가 제한적인 신호이므로 자극과 일치하지 않는 감정을 표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동물의 감정 표출 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내 의견을 반박하는 동물학 연구가 있다면 자료 제공을 부탁드린다).
언어철학에서는 화행론(speech act theory)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의 핵심은 “말 또는 언어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언어란 주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런 기본적인 기능 외에, 언어는 행동을 한다. 언어가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언어가 힘을 갖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언어가 힘을 발휘하면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예를 들어, 결혼식장에서 주례사가 “두 사람의 결혼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여러분 앞에서 엄숙히 선언합니다”라는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면, 두 남녀가 부부가 되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여기 교실이 오늘 왜 이리 춥지?”라는 혼잣말을 하더라도 학생 중 한 명이 난방기 스위치를 켜서 교실이 따뜻해진다. 이처럼 언어는 세상을 창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진 언어는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이므로 이런저런 실수를 한다. 직장에서 부하직원이 상관에게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아쉽게도 그 보고서에 오타가 하나 발견된다. 최종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수정하면 되니 큰일은 아니다. 그런데 상관은 부하직원에게 오타 하나에 큰 의의를 두면서, “도대체 김대리는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건가?”, “이렇게 직장에 애사심이 없어서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김대리는 매사가 다 이렇게 엉망이군”처럼 부하직원의 감정을 다치게 한다. 사실 한 번 다친 마음의 상처는 잘 치유되지 않는다.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한 번 입으면, 그 부위는 완쾌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정은 보편적이고 생득적이다. 진화적 관점에서 동물과 인간의 감정은 이런 유기체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혐오나 두려움, 놀라움, 화 등의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이 있을 때는 그 자극과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도망가려고 반응한다. 이러한 반응을 투쟁 또는 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라고 부른다. 감정이 보편적이고 타고난 것이며 생리적 현상이므로,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이라는 자극으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을 상대방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다치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감정을 다치는 것은 감정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인간의 간단하지 않은 복잡한 감정이 가능한 것이 우리 4명의 모임에서 계급이 있듯이 감정에도 ‘계급’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가장 높은 계급의 감정은 인간과 동물이라면 모두 갖고 태어나는 보편적인 일차적 감정(primary emotion)이라고 부른다. 일차적 감정을 ‘행복, 슬픔, 혐오, 두려움, 놀라움, 화’처럼 6가지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고, ‘슬픔, 기쁨, 화, 공포, 기대, 놀라움, 신뢰, 혐오’처럼 8가지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 일차적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이나 원인은 사람이 포함된 사건이나 상황이다.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만 잘 살피면 어떤 감정이 표출될지 예측도 가능하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 이차적 감정(secondary emotion)도 있다는 것이다. 이차적 감정은 복합적 감정(complex emotion)이라고도 한다. 이 이차적 감정은 일차적 감정 밑의 계급에 속하는 감정이다. 이차적 감정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두 가지 일차적 감정이 결합하여 이차적 감정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놀라움’이 섞여서 ‘경외’라는 감정이 나오고, ‘두려움’과 ‘신뢰’가 섞여서 ‘순종’이라는 감정이 나온다. 둘째는 한 일차적 감정이 원인이 되어 이차적 감정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이는 어떤 감정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말한다. 예를 들어, ‘화’가 난 이후에 ‘수치심’을 느끼거나 ‘화’의 결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이차적 감정이다. 또는 ‘기쁨’이라는 일차적 감정이 자극이 되어 ‘안도감’이나 ‘자만심’이라는 이차적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원인이 되어 ‘증오’라는 이차적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일차적 감정과 달리 이차적 감정은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인간적 감정(human emotion)이다.
일차적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은 사건이나 상황이지만, 이차적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은 선행하는 특정한 감정이다. 원래 일차적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지 않는 감정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금방 사라지니 말이다. 그런데 이차적 감정은 우리에게 오래 머문다. 잘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 감정의 자극은 외적인 사건이나 상황이므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고, 관찰 결과 대응법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차적 감정의 자극은 내적이다. 즉, 내 마음속에서 유발된 감정이다. 내적인 자극은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포착하기 힘들다. 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자극으로 인해 생긴 이차적 감정은 내가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 수치심, 원망, 좌절, 후회 등의 이차적 감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쌓이면서 더 큰 상처와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은 종종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나 우리 삶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차적 감정은 일차적 감정에 복잡한 반응이 배어들게 하므로 일차적 감정보다 명명하기가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인간은 변연계라는 포유류의 뇌를 가지고 있지만, 신피질, 특히 전전두피질로 구성된 뇌 부위도 있다. 이 부위는 사고, 언어, 문제해결, 판단 등 합리성 및 이성과 관련된 활동을 처리한다. 우리 인간은 변연계에서 특정한 자극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감정을 느끼지만, 언어를 통해서는 다른 감정이 표출된다. 이는 인간에게는 뇌에 신피질 부위가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의 신피질이 상대의 변연계를 공격해서 상대의 감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만의 특징이다. 나에게도 변연계가 있어서 상대방에 대한 변연계의 작용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런 능력과 지식을 상대의 감정을 다치게 하는 일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의 변연계와 상대의 변연계를 같은 것으로 여기면서 상대의 감정을 잘 안아주는 사람을 우린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차피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이런 운명이라면 이왕이면 나의 신피질과 변연계만 중시하고 상대의 변연계는 무시하는 칙칙하고 삭막한 사회가 아닌, 모두가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