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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May 31. 2023

언어를 너무 믿지 마시길!

며칠 전에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대학 1학년 때 같은 동아리에서 만나 지금까지 30년 넘게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이다. 그 친구는 한 가지 고민이 있다고 했다. 사업상 만나는 여성에 관한 고민이었다(참고로 내 친구는 아직 미혼이다). 그 여성과 만남을 계속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른바 연인 관계로는 진척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기적으로 만나 식사하고 때로는 좋은 선물을 사 주면서 호감을 표현했지만, 그 여성의 반응은 크게 변함이 없다고 한다. 우리 친구도 그 여성이 이 관계를 연인 관계로 발전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래도 그 여성에게 직접 한 번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 그 친구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 여성의 입으로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 난 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단호했다.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언어’를 너무 믿지 말라고 말했다. 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사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가령, 중학생 아들이 공부를 너무 안 하니 아내가 남편에게 아들에게 말해서 공부 좀 하게 만들어 보라고 한다. 이것은 말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가 언어로 해결된다면,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중학생은 모두 하나같이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언어는 우리 현실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표현할 뿐이다. 표현된 것보다 표현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우린 앞에 있는 것만 본다. 그것도 가시선 범위에 있는 것만 본다. 그것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본다. 보이지 않는 많은 앞면이 있고, 옆면과 뒷면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언어가 우리 현실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몸은 서로 많은 무언의 대화를 한다. 우리의 근육, 내장, 감각, 분비선에서 나오는 신호와 정보는 이런 무언의 대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미묘하게 조정된다. 그리고 뇌는 이런 몸의 신호를 받아서 신체 부위 간의 대화에 관여한다. 몸의 자극과 신호를 받아야만 활동하는 뇌의 기능도 각양각색이다. 이성을 관장하는 곳, 감정을 관장하는 곳 등 그 역할이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뇌의 해당 부위들도 미묘하게 서로 얽혀있어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신비한 몸과 뇌로 인해 그 주체인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라는 말이 이를 암시한다. 


그 여성의 말을 듣고 우리 친구가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여성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를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다음 날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제 내뱉은 말과 반대되는 생각들이 흘러 지나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여성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많은 행동을 보여주었다. 우리 친구도 그 여성의 몸과 마음속 전체에 흐르고 있는 그 여성의 무언의 언어를 즉흥적이고 실시간으로 해석해 자신의 차후 행동을 결정하면 된다. 


나는 언어를 너무 믿지 말고 너무 많이 동원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이 말이 너무 강하게 들린다면, 언어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완화할 수도 있다. 이런 내 입장은 언어에는 ‘사고’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횡설수설하는 말이 아니라면, 모든 언어에는 논리성이 있다. 그 논리성을 바탕으로 언어가 표현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 이성은 몸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인간의 뇌는 수십억 개의 서로 연결된 뉴런으로 구성된 복잡한 기관이다. 뇌가 복잡하긴 하지만, 무게는 겨우 1,300~1,500g 정도이다. 이는 사람 몸무게의 약 2%를 차지하고 몸의 총 에너지 중에서 약 20%만을 차지한다. 우리의 몸 전체 중에서 뇌가 차지하는 무게와 에너지는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다. 문제는 뇌 부위 중에서 이성을 관장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뇌 부위는 크게 전두엽, 후두엽, 두정엽, 측두엽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사고와 이성을 관장하는 것은 전두엽이다. 전두엽 중에서도 인간이 태어나 20년 정도 후에 완전한 모습을 갖추는 전전두피질이 사고와 이성의 자리이다. 


인간의 기억력 용량과 음식을 소화하는 위장의 용량이 무한하지 않고 정해져 있듯이, 사고와 이성을 위한 뇌 부위인 전전두피질의 용량도 정해져 있다. 이 말은 우리의 하루 중에서 사고를 위해 전전두피질을 동원해야 하는 일은 극미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무언의 작용인 몸이 알아서 한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생각 없이 루틴대로 양치하고 세수하며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한다. 지하철을 이용하든 자가용을 이용하든 이동 중에 가벼운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직장에 도착한다. 직장에서도 사고를 동원해야 하는 일은 크게 없다. 루틴대로 직장 업무를 보면서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때 전전두엽 피질에 호소하면 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사고를 동원하지 않고 하던 일을 하면 된다. 퇴근 후에는 더욱더 이성을 사용할 일이 없다. 물론 집안 문제로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이성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면 된다. 그리고 잠을 잔다. 


문제는 루틴대로 하면 되는 일에 우리가 사고를 동원하는 것이다. 이는 양치를 할 때 여러 치약을 구비하고서 오늘은 무슨 치약을 사용할지 생각하고 고민 후 양치를 하는 경우이다. 잠을 잘 때도 그냥 잠을 자야 하는데, 직장에서 해결되지 않은 일을 침대에까지 가져와 전전두피질을 호출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잠을 푹 자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제한된 용량의 전전두피질에 너무 많은 일을 위탁하면 그는 화를 낸다. 그 화가 바로 ‘자아의 저주’이다. 이성의 주체인 자아가 우리에게 저주를 내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이 대표적인 자아의 저주 현상이다. 


계획성 있는 삶!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을 존중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런 사람은 제한된 용량의 전전두피질에 너무 많은 일을 맡김으로써 자아의 저주에 걸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즉흥적인 삶, 실시간적 삶! 이것이 내가 추천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는 우리 삶 전체에서 2% 미만으로 사고와 이성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몸에게 맡기는 삶의 방식이다. 이번 주말에 있을 썸녀와의 데이트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할지 미리 계획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사실 미리 계획된 농담이 썰렁하듯이, 미리 계획된 감정적 만남은 상대에게 큰 매력이나 유쾌함을 주지 못한다. 큰 그림만 대충 그리고 나머지는 즉흥적이고 실시간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만남을 진행하는 것이 상대의 유쾌함을 자극하는 길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전전두피질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느낌대로 글을 써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글의 논리성을 위해 사고와 이성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이 된다. 여하튼 오늘도 난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하루를 살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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